[부부의날] 시아버지를 고발합니다!
[부부의날] 시아버지를 고발합니다!
  • 박영자 기자
  • 승인 2020.05.20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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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生)이란 어디에서 죽음이란 어디에로
오감과 있고 없음 모두가 자취없네

그다지도 잊지 못할 집 생각 어이하고
청산에 홀로 누워  무슨 생각 그러는가

애정에 한을 느껴 미련에  잠겼는가
빈산 중 끌새 울음 어이 그리 구슬프냐

전생에 주린 정한 이 울음에 잠겼는가
한생을 같이 살다 홀로 감이 슬퍼워라"

 

유품을 정리하다 나온 돌아가신 시아버지 글이다. 찢어진 노트 조각에 메모해 놓은 쪽지글을 읽는 순간  감동의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머리 끝에서 가슴 골을 파고 내려 발 끝까지 쌓여 있던 그 무언가 뜨거운 것이 확 씻겨 내려간다. 내가 왜 이러지?  생각은 수십 년을 거슬러 내 어린 며느리 적으로 돌아간다.

 

소금에 폭 곰삭아 노랗게 짤아빠진 생선~. 그것도 부족해서 소금단지에 넣어 또 절인다. 아버님의 별난 식성 때문에 어머님은 유통기한 지나 생선가게 한 쪽으로 밀쳐 놓은 조기, 돔배기, 고등어 등등을 보이는대로 사서  빨래방망이처럼 만든다. 쌀뜨물에 푹 담갔다가 풋고추 쏭쏭 썰어 넣고 마늘도 넣어 밥할 때 뚝배기에 넣어 얹어 놓으면 짭잘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라며 즐겨 드시는데 놀랍고 이해가 안된다. 국수를 삶을 땐 콩가루 반 밀가루 반을 넣어서 홍두깨로 밀어 배추와 호박을 듬뿍 넣어 된장으로 간을 한다.

제때 만든 음식이 아니면 죽은 음식이라며 손도 대시지 않았기에 남겨진 음식은 오롯이 여자들의 몫이었다. 한여름에 열무김치를 하루 걸러 한 번씩 담그니, 나머지 식구들은 시어빠진 김치를 진저리가 나도록 먹었다. 덕분에 지금은 신김치를 더 즐겨 먹게 되었지만, 밤늦게 들어오셔도 금방 새로 밥과 된장을 끓여야 했다. 저녁에 해 먹은 음식도 안 되었다.
한마디로 시어머니는 골병이 들었다. 식모가 있었지만 정성들여 늘 손수 하셨다.

며느리로서 밥상 들고 들어가면 그릇이 비워질 때까지 맘 졸이며 앉아 있어야 했다. 훈계와 가르침을 받아야 했다.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아닌 시아버지 시집살이를 죽어라고 했다. 맏며느리 시험을 호되게 치른 후 울렁증이 생겼다. 어머니의 인생도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살림을 놓아 버렸고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버리셨다.
한복 입고 올림머리 하고 남들 보기엔 우아하고 행복한 새댁이었지만, 그 생활은 산 것이 아니었다. 꼭두각시처럼 살며 버텼다.

대청마루 문을 열어 젖히는 소리에 새벽 5시만 되면 일어나야 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하시며 "게으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빌어 먹는다"며 가족을 괴롭히던(?) 아버님이셨다.

아버님은 고향에서 자전거 하나 훔쳐 나와 만주와 서울로 다니시며 자수성가하셨다. 성리학에도 일가견 있어 유림으로서도 인정받고 사업에도 성공한 분이셨다. 그렇지만 '가화만사성'은 아니었다. 시어머니를 대신해 저승에서라도 두 분이 화해하길 바라면서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시아버지를 고발한다. 두 분이 서로 만나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시어머니는 모든 것을 며느리에게 맡긴 후 은연 중에 시집살이를 시키셨다. 두 어른이 너무 불편해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가 혼났다. "아내는 다시 얻으면 되지만 부모는 절대 못 버려"하며 꾸지람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지만 그땐 많이 섭섭했다.
시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임금에게는 '노'(No)를  할 수 있지만 부모에게 '노'란 있을 수가  없는 법이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아들은 또 어떤가.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하는 것 보고 장가 가면 그대로 하겠"단다. 맘 고생하는 아내를 위로해주지는  못 할지언정…. 새댁은 그 이후로 입을 닫기로 결심했다.
 
 아버님에겐 소가(小家)가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어머니는 웃음도 잃고 맥없이  줄담배만  피워대셨다. 그런 시어머니의 모든 히스테리는 고스란히 며느리의 몫이었다. 옹이가 돼버린 그 무엇이 억누르고 있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뭔가'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여자로서 아내로서 사랑받지 못한 외로운 삶은 한으로 남아 차곡차곡  쌓여 태산이 되었다.
 
그 소가댁 시동생(초등 1년)이 토요일이면 "큰엄마~" 하면서 담배 한 보루를 사서 어머니께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님, 도련님 안 미워요?" 
"새끼가 무슨 죄가 있노, 너그 아버지가 밉지"라면서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사랑하셨던 분이다.
"그 여자도 불쌍하다. 저렇게 까다로운 영감 떠넘기고 나니 후련하다"고도 하셨다. 
연신 담배를 피우고 또 피우셨다. 연기 속에 한숨과 눈물을 날려보낸 수많은 세월은 먹구름 되어 허공으로 떠돌았다. 얼마나 가슴을 쳤기에 담배 연기와 함께 젖먹던 힘까지 내뱉아 굴뚝 속의 잿빛이 구름이 되어 날아갔을지 나는 안다. 시원한 소나기가 되어 내려주면 좋으련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말만 들어도 무섭다. 중풍이 먼저 온 후에 치매. 온 집 안에 배어 있던 그 싸한 냄새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림으로 얼룩진 장판을 수도 없이 버리고 갈아봤지만 어머니의 냄새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것 같다. 훗날 내 모습이 걱정되고 두려웠다. 피할 수 없는 나이 들어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에 혹시나 하고...
밤낮이 따로 없이 긴장을 놓을수 없었고 감당할 수없는 힘든 날들이었다. 7년이란 세월의 간병에 며느리가 먼저 죽게 될 지경이었다. 잘나가던 서울 시누이들 1년에 한 번 와서는 "자네 혹시 폐병인가 병원 한 번 가봐" 하며 염장을 지른다. 몸무게 39kg.

사업을 하니 돈이 필요할 때만 어머니를 앞장세우던 아버님. 여자로서 대접 한 번 받지 못하고 목빠지게 기다리는 삶만 살아온 어머님은 그게 한이 되어 치매가 온 것이다. 바깥을 모르고 오직 집 안에서 미운 남편 바라기만 하셨다. 경상도 양반 체통 지키는 데만  힘을 다 쏟아붓고 껍데기 인생만 살다 가셨다.

항상 앞가르마를 곱게 타고 동백기름을 발라서 흐트러짐 하나 없이 비녀 지른 쪽머리에 천생 여자였던 어머님. 남편에게만은 끝까지 여자이고 싶어서일 거다. 곱디 고왔던 어머님. 상처와 질투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조선시대 사람이다. 부부의 정을 듬뿍 받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 짝사랑만 하다 가셨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왜 돌아가신 후에야 이 글을 썼는지. 이 순간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원망하면서 허공에다 대고 고발한다. 진작 "사랑한다" 한 번 말해주고 보듬어주시지....

치매란게 참 신기하다. 어제 오늘 일은 기억을 못하는데 쌓여 있던 아픔이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나니 나타난다. 서울에서 6.25전쟁이 나서 고향으로 피난 올 때 아버님은 행방불명되고, 한 달 된 갓난 아기는 수원역에서 많은 인파들에 의해 잃어 역 부근에 묻어 두고 오셨다.  여덟 식구가 엄마 하나 믿고 올망졸망 따라오면 죽겠다 싶어 내 남편인 장남은 큰아버지 허리춤에 자기를 끈으로 묶어 큰집 식구들 틈에 끼어 눈치코치없이 고향으로 먼저 와버렸다. 그런 사실도 모른 어머님은 자식 둘에 남편까지 잃었다며 그때부터 미쳐버린 것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담배꽁초 주워온 것으로 버텼다. 치매가 걸리신 후 누에고치 풀어내듯 끝없이 되풀이하신 것이 이 두마디다.

문소리만 나도 "보소 보소, 우리 사랑방에 웬 여자가 왔다가네~."
"우리 윤이 못봤어요?" 

그 외에는 다른 말이 없으셨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응어리들이 돌아다니다가 밀물과 썰물이 되어 조각조각 뜯겨 나오고 있었다.

살아 생전 사랑한단 말 한마디와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하고 늘 뒷전에서 가슴앓이 하시던 어머니...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에 사무치는 미안한 맘을 간직만 한 채,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님도 안타깝다. 검소하고 부지런하게 살며 자식사랑 넘치시고 대장부 남자로서의 성공은 며느리도 인정하고 존경합니다만, 어머니로서의 일생이 아닌 한 여자의 일생이 너무 억울해서 당신을 고발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묘 옆에 두 어머니 모시니 부부 세 분이  나란히 계십니다. "그래도 동서보다는 낫다"고 하신 어머님의 하늘같은 맘을 알고 있기에 며느리가 저질렀습니다. 제사도 나란히 세 분을 함께 모십니다.(인연이란 숙제가 늘 따라다녔지만 가족 모두가 찬성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립고 많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부부의 연으로 만났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보완하면서 살아야지, 옛 어르신들은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력도 해보지 않고 여성들을 무시하셨다. 소가(小家)가 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신 것 아닌가 싶다. 옛날엔 남편의 무책임한 선택으로 많은 여성들은 억울한 삶을 희생하고 살아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점을 조화롭게 수용해야 한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다른 환경과 생활양식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서로가 상당한 노력을 해야 한다. 결혼 1년 후가 되면 덜 만족하고, 결혼할 때만큼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덜 행복하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현대의 부부들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을 시대의 흐름이라 핑계대지 말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참아보는 연습도 필요하다고 본다. 부부 중 누군가는 조금 더 양보하고 희생을 해야 원활한  사회가 되고 행복한 부부와 가정을 이룰수 있을 것이다.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대화를 많이 하고 살자. 부부가 행복하게 살면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이다.

☆지식만 넣어주는 부모가 되지 말고 감사합니다, 사랑해, 고마워, 수고했어라는 말을 아낌없이 하자. 특히 결혼 전보다 더 많이 하면서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는 부부, 부모가 되자. 모든 사랑은 각자 하기 나름이며 내 환경은 내가 만든다. 맘 속으로  아무리 사랑해도 상대가 모르면 소용없으니 말로 표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