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배리 삼릉에서 만나는 새 생명들과 황홀한 자연
경주 배리 삼릉에서 만나는 새 생명들과 황홀한 자연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05.1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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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마리가 남는다 해도 몽땅 어머니 차지다.
그렇지만 밉지 않은 시절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모든 생명들은 뭇 생명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2012년 12월의 어느 날에 만난 삼릉의 환상적인 빛내림. 이원선기자
2012년 12월의 어느 날 만난 삼릉의 환상적인 빛내림. 이원선기자

1960년대 중후반 봄철이면 김동리 소설의 ‘감자’ 처럼 방과 후 숙제로 송충이 잡기가 더러 있었다. 어머니나 누나들이 잡은 것은 소설 속의 복녀처럼 마리당 얼마간의 돈으로 환산되었다. 하지만 숙제로 주어지면 이와는 달랐다. 고무줄과 나무작대기를 이용해서 집게를 만들었고 내남할 것 없이 소나무가 우거진 산 속을 헤맸다. 어린 나이에 만만찮은 작업이지만 손바닥에 떨어질 매가 무서워 할당량만큼은 어김없이 잡아 돈과는 별도로 꼬박꼬박 선생님께 바쳐야 했다. 몇 마리가 남는다 해도 몽땅 어머니 차지다.

송충이는 흉측하고 징그러운 곤충이다. 얼룩덜룩한 무늬, 길고 짧을 털이 부숭부숭 뒤섞인 것들이 구불텅구불텅 기어 다닐 때면 “어매 흉물스러운 것”하며 어머니께서는 손사래를 쳤지만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또래의 가스나(여자)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말 한번 섞으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지는 양 여겨서 멀찌감치 피하던 애들이 이때만큼은 헤실헤실 헤픈 웃음을 흘리며 “저기 있지” 부탁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못 이기는 척 잡아다주면 고맙다는 말 대신 혓바닥을 쏙 내밀어 보이는 것으로 끝이다. “메롱~.” 아마도 그게 정을 내는 모양이었다. 감꽃을 깨물 듯 세월의 강을 넘어온 알싸한 기억들은 나이에 반비례하여 여운을 그리는 날이 잦아들고 그렇지만 밉지 않은 시절이었다.

소나무는 겉씨식물로 구과목 소나무과의 상록침엽으로 교목이다. 학명은 ‘Pinus densiflora’으로 분포지역으로는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 등으로 줄기는 높이 35m, 지름 1.8m크기로 자란다. 한자어로 송(松), 적송(赤松), 청송(靑松)이라고 한다. 수피는 붉은 빛을 띤 갈색이나 밑 부분은 검은 갈색이다. 바늘잎은 2개씩 뭉쳐나고 길이 8∼9cm, 너비 1.5mm이다. 2년이 지나면 밑 부분의 바늘잎이 떨어진다. 잎은 소화불량 또는 강장제로, 꽃은 이질에, 송진은 고약의 원료 등 약용으로 쓴다. 화분은 송홧가루로 다식을 만들며 껍질은 송기떡을 만들어 식용한다. 건축자재로 많이 사용되며 황장목(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던, 질이 좋은 소나무), 금강송, 춘양목(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높은 산지대에서 자라는 소나무 또는 그 재목) 등등이 있다.

작은 틈새를 이용하여 새싹을 틔우고 있다. 이원선 기자
작은 틈새를 이용하여 새싹을 틔우고 있다. 이원선 기자

'송구’(송기·소나무의 속껍질. 쌀가루와 함께 섞어서 떡이나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보릿고개란 말이 사라진 지금은 별미로 여기지만 당시는 간식이지만 주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상큼하고 쌉싸래한 찔레 순을 꺾다가 허허로운 뱃구레를 채우기 위해 결국 산을 찾아 송구를 훑는다. 송홧가루가 날리기 전 싱싱한 새순을 낫으로 댕강 잘라서 거친 겉껍질을 벗겨낸 후 이로 훑으면 찐득한 송진과 함께 달짝지근한 소나무향이 입 안 가득 고였다. 먹는 것이 부실했던 아이들에게는 그만한 주전부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 날이다. 먹을 때는 달달하고 좋았지만 심한 변비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두엄더미 아래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도록 용을 쓰지만 늘 허사로 끝나고 나무꼬챙이를 든 할머니의 손을 빌려야 했다. 집집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보니 딱히 흉이랄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송구로 인한 변비를 얼마간 해소시켜 주는 것은 된장이다. 당시는 별 반찬이 없어 집집마다 애호박이나 무를 넣어 끓이는 된장찌개 냄새가 진동하다 보니 유년시절을 무사히 넘겼나보다.

지난 5월 6일(수) 일기정보에 잔뜩 기대를 걸고 이른 새벽 경주 삼릉을 찾았다. 날씨가 맑고 습도가 90% 이상이면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고 그 사이로 빛이 스며들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안개를 헤치고 스며드는 빛은 청솔가지를 뚫어 소나무 사이사이를 지나는 동안 강렬한 빛 내림을 만들어 이상세계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일어날 확률은 20~30%에도 못 미친다. 따라서 자연의 조화는 사람들이 만든 과학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때는 별 기대감 없이 찾았다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환상적인 풍경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주 배리 삼릉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릉이 있는 곳으로 경주시 배동에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적 제219호며 그 남쪽 실개천을 가로 지른 석교를 지나면 곧바로 신라 55대 경애왕릉이 있다. 대개의 경우 능의 앞쪽이 남쪽을 향하지만 삼릉이나 경애 왕릉의 경우는 경주 남산(금오산)을 배산(背山)으로 앞쪽이 서쪽을 향하고 있다. 임수(臨水)로서 형산강이 흘러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地勢)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인 자리를 뜻함)란 명당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5cm내외의 새싹이 울울창창한 낙락장송 아래서 새 생명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원선 기자
5cm 내외의 새싹이 울울창창한 낙락장송 아래서 새 생명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원선 기자

평일임에도 SNS 등에서 정보를 공유했는지 벌써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왔지만 그 기대에 못 미치는 자연에 은근히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반사로 흔히 있는 일이기에 불편한 심기는 장독뚜껑을 닫듯 가슴 저 밑바닥으로 밀어버리곤 이곳저곳을 누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지 “새벽 3시 잠을 깬 것이 원수다. 어제는 일기정보와는 달리 참 좋았는데...” 하며 토로한다. 안타까운 마음이 동감으로 “늘 그렇죠?” 선문답처럼 어정쩡하게 내뱉고는 한발 물러서고 보니 옅은 빛 내림 속의 숲은 여전히 풋풋하고 싱그럽다. 풀은 어제의 풀처럼 여전하고 나무도 어제의 나무와 매일반으로 의젓한데 사람들은 이기심이 움찔움찔 솟는지 머릿속이 퉁퉁 부어 보인다. 이럴 바에는 퍼질러 엎어지던지 모잽이로 눕던 억지춘양(일제 강점기 왜놈들이 춘양목을 수탈할 목적으로 억지로 춘양역을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격으로 잠이나 청할 걸 하는 웅심이 은연 중 존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동지를 지나 북쪽으로 치닫는 태양이 확연하여 그림자가 한참이나 남쪽으로 기울었다. 늦가을 이제 겨우 햇살이 아침인사를 건넬 참인데 벌써 한낮처럼 하늘에 둥실하다. 하나둘 떠나기 시작한 사람들이 그림자를 주섬주섬 사려 보이지 않을 때쯤 봄을 찾는 아주머니 한 분이 아래쪽으로부터 바닥을 훑어 오른다. 아주머니의 진지한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불현듯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아주머니처럼 땅바닥을 훑기 시작한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논밭에 씨를 뿌리는 모습을 닮았다. 손에는 생명을 품은 씨앗 대신 차가운 금속덩어리로 만든 카메라가 들려 있을 뿐인데.

억겁의 세월 속에서 늘 그랬듯 소나무의 그림자는 거칠게 갈라진 거북등짝처럼 땅 가죽 위에서 느릿느릿 기어간다. 그럴 때마다 양지와 음지가 교차를 반복한다. 그런 가운데 창해일속(滄海一粟), 잃어버린 좁쌀 한 톨을 찾듯 여전히 시선은 땅을 향했고 그 노력의 끝에 눈에 보일 듯 말 듯 푸릇푸릇한 작은 생명체 하나를 기어이 찾는다. 3cm, 4cm, 아니면 5cm 남짓, 여리고 여린 줄기가 부채살처럼 벌어져서는 까만 씨방을 머리에 이고는 메마른 땅거죽을 쇠꼬챙이가 되어 뚫었다. 행여 생채기가 날까 아주 천천히 우주의 빈 공간을 향해 머리와 동체를 밀어올리고 있다.

새 생명의 탄생은 언제 봐도 신비롭고 경이롭다. 사람의 생명이 열 달을 기다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대지의 기운을 받아 이 땅으로 나왔다면, 식물의 탄생은 가을철 땅으로 내려와 혹독한 겨울을 지나 봄기운을 빌려 메마르고 거친 땅을 뚫어내는 것이다. 그림자를 벗어난 그 자태가 숭고하여 카메라를 들이밀기가 두렵다. 그렇다고 마냥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잠시만 지체하면 어미의 날갯죽지에 태양빛이 가려 온전한 모습이 한풀 죽는 것이다. 그럼 또 내일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내일은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지도 모른다.

삼릉의 주위론 소나무들이 울울창창(鬱鬱蒼蒼·큰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우거진 모습)이다. 바람이 기어가고 햇빛이 고개를 숙인 아래로 우후죽순처럼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소나무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아 다복솔처럼 소복하다. 어떤 것들은 어미의 몸에 바짝 말라붙은 보잘 것 없는 흙부스러기를 토대로 신접산림을 차렸다. 특이한 모습이 눈길을 끌지만 조금만 지나면 후회스러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녀석만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은 아니다. 지천으로 널려 꿈틀거리는 생명체 대부분이 자연이 주는 삶의 터전에서 뿌리를 잘못 내리기는 매 한가지다. 낙락장송의 어미인들 그런 현실을 모를까? 가진 능력의 한계가 그것뿐이기에 애써 외면할 뿐.

이 날은 황홀한 빛 내림이라기 보다 은은한 빛 내내림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이원선 기자
이 날은 황홀한 빛내림이라기 보다 은은한 빛내림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이원선 기자

봄날이면 운명처럼 솔방울을 달고 여름철을 맞아 알알이 영글어 가을철이면 땅으로 떨어트린다. 거기까지가 본능이자 본연의 업무다. 그 다음은 스스로의 운명에 맡겨 바람이 다독이고 자연이 품어서 살찌우기를 바랄 따름이다. 손과 발이 있었다면 벌써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중심이자 배산임수의 길지로 옮겼을 테지만 그저 멀거니 바라만 본다. 매년 겪는 지독한 속앓이에 머리는 시퍼렇게 멍들고 가슴은 시우쇠처럼 달아서 벌겋고 아래는 썩어 문드러지는 양 거무튀튀하게 삭은 듯하다. 사람이나 짐승들이 동적인 삶이라면 식물들은 정적인 삶으로 삶과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어 자연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운명의 한계는 거기까지인 것이다.

갓 태어난 생명을 두고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느낌이다. 벌써 죽음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작고 여리다. 슬슬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지천으로 널려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비단 소나무뿐만이 아니다. 이는 극히 일부분으로 봄기운을 빌어 부지기수의 생명이 탄생하고 부지기수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 그 중 일부가 숲을 이루어 지구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현재를 유지하는 모든 생명들은 뭇 생명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렌즈 속으로 들어온 가녀린 생명에 경의를 표하며 셔터를 누른다. 비록 무명으로 사라질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작은 바람에도 연신 벙글은 연록의 새싹에서 삼릉의 푸른 미래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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