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9)-배신의 분노
녹슨 철모 (59)-배신의 분노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5.1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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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이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소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군의관이 군단장 표창을 탔다는 이야기가 야전병원에선 하나의 사건으로 이야깃거리였다. 보병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그런 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 모두 신기하다고 하였다. 게다가 그 외곬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이 어떻게 보병 지휘관들과 조화를 이루어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갖고 있는 두 가지 반대되는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항아적인 성격과 순종 · 복종하는 성격, 사랑하는 성격과 미워하고 이죽대는 성격, 남에게 주는 성격과 가지려고 하고 안 빼앗기려고 하는 성격, 그는 환경과 상대에 따라 두 성격 중 어느 하나가 불쑥 분리되어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야, 너 정말 대단하다. 축하해, 어떻게 그런 상을 다 타니? 간첩이라도 잡았냐?”

"에이, 형님도 절 놀리깁니까? 제가 군바리들의 상을 타는 게 아니꼽다는 거죠?”

"아냐. 진심으로 난 널 존경하고 싶어. 한 번 마음먹으면 밀고 나가는 성격,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은 못해.”

"형님은 별 일 없었수?”

"나야, 뭐....”

“응, 난 또 형에게 무슨 일이 없었나 하고요.”

“여봐, 일개 군의관 주제에 무슨 일이 있다고.”

“그게 아니고요. 보안대에서 절 주시하고 있대요. 요즘 언론 문제 때문에요.”

"아, 동아일보에 육군 중위가 익명으로 광고낸 사건 말이지?"

동아일보가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의미로 백지 사설을 싣자 정부가 동아일보 신문 광고를 전면 차단했다. 동아일보는 계속 백지사설을 싣고...광고도 계속 싣지 못하고.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수백 명이 작은 광고를 동아일보에 게재했다. 그 광고 중에 하나가 스스로를 육군 중위라는 이름으로 격려광고를 낸 사건이다. 소위 '동투위(동아일보 투쟁위원회)' 사건이다.

"형, 혹시 그것도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건 아닐까요? 말하자면 흑색선전용으로요.”

"그렇게 하면 박정희가 무슨 덕을 보는 거야?“

“그야 동아일보에 광고 낸 육군 중위를 찾아낸다고 온 군을 휘저어 떠들썩해지면 그 결과 군인들이 꼼짝 못하게 되잖아요.”

“야! 그런 정치 얘긴 그만두자. 넌 그래 별 일 없어?”

나는 간호장교 유 중위를 염두에 두고 짐짓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 본 것이었다.

“말하기에 달렸네요. 일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고.”

"그건 무슨 이야기야. 득남한 것 말고 또 사건이 있니?"

“세상살이 어디 편안한 데가 있어요? 그건 그렇고, 그 병세가 또 도지나 봐요?"

“뭐, 너의 가을병?"

“네, 그래요. 무척 힘이 들어요. 예를 들면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내일 내가 눈을 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어요. 그래서 자다가 한 번씩 눈을 떠서 봐요. 아직 내가 살았나 하고, 어떤 때는 맥박이 까닭 없이 빨리 뛰기도 하고요. 가끔씩은 얼굴로 화끈한 것이 치밀어 올라오기도 하고요.”

"그건 전에 없던 증상 아니야? 전에는 우울증만 있었잖아? 지금 말한 건 불안증상인데? 왜 무슨 신경 쓸 일이라도 생긴 건가? 너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거지?"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전 아들도 낳았고 군단장 표창도 탔어요. 이런 기쁜 일들이 그득한데 내 마음은 거꾸로 죽고 싶기만 해요. ‘success depression’(성공 뒤에 오는 우울증상)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보기엔 그런 증상들 외에 상실의 아픔 같은 것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그럴지도 몰라요. 상실 혹은 배신의 분노일지도 모르지요.”

"야! 너 너무 거창하게 말하는데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냐?“

정말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유 중위가 자신과의 약속과 달리 딴 곳으로 혼자 전출갔다는 내용 같기는 한데 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토록 상처가 되고 배신으로 느껴질 수 있을까? 나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우울이나 분노를 느끼면 사고에 변화가 와서 흔히 판단 오류를 범한다. 화났을 때 함부로 감정 표시를 하고 나서 나중에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후회하는 일이 바로 그런 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는 유선영이 택한 길은 이성적이며 현실적 해법이었고, 태원이 가고자 하는 방법은 낭만적이긴 하나 몽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길인 것 같았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의 삶이냐 존재의 삶이냐의 한 예를 보는 것 같다. 여기서 누가 옳다,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일은 아닌 것이다. 태원은 성격상 항상 사물을 보면 옳은 것 아니면 잘못된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곤 했다. 사실 현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가운데가 가장 많다는 걸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태원이 좋게 말하면 이상적이며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소유의 삶의 형태는 제 혼자 살 때나 가능한 일이지 상대가 있을 때는 그와 같은 사고와 감정을 갖고 함께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하려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하물며 그런 시도의 상대가 여자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태원과 나는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차마 사실대로 표현을 못하고 선문답처럼 언저리를 맴돌았다. 아마도 그는 선영이 59후송병원으로 혼자 전출 간 사실을 알고 무척 화가 나서 나를 찾아온 듯하였다.

참모장 박 준장의 주재로 본부대 회의가 시작되었다. 태원의 특징은 이런 데서도 잘 발현되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있어도 남들 앞에선 그의 고통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가 어렵게 꼬여갈 때라도 그는 업무에는 항상 충실하게 임하였다.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특징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작 그런 태도가 본인에게는 생명의 단축을 뜻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는 좀처럼 울거나 앓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딴 사람들은 태원이 ‘강인하다, 대단하다, 불평할 줄 모른다’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항상 시커멓게 멍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야, 당신들 정말 이럴 거야? 응, 우리 부대 뒷산에 밤 한 톨 제대로 달려 있는 거 봤어? 지금 또 뭐야? 가을이 되어 가니 또 애들이 감 따 먹는다고 난리 아냐? 그것도 익지도 않은 풋감을 말야?"

태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 사람아. 애들이 그러기 예사이지. 당신이 매일 애들에게 초콜릿을 줘봐. 그래도 밤 따 먹고 풋감 따 먹는가?’

“우리 부대에 손님들이 왔을 때 붉은 감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모두 얼마나 보기 좋다고 칭찬할 건가 말야.”

태원은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 그 손님이란 놈들은 군인부대를 유원지로 알고 오나? 경치 운운하게’

“오늘부터 보초 세워!"

“참모장님, 어디에 말씀입니까?”

눈치 없는 본부대장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딘 어디야. 감나무 아래지.”

태원은 또 혼자 중얼거렸다.

‘세상에 사병들이 나라 지키려고 입대했지 감나무 지키러 입대했남?’

"그거 참 좋은 말씀입니다. 늦가을에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부대에 달려 있으면 예하부대 지휘관들이나 손님들이 와서 보고 얼마나 우리 부대를 칭찬할까요?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난 번 회의에서 결론이 났던 영내 차량 과속 운행 시정 조치는 왜 아직 안 지켜지고 있는 거야? 긴 말 할 것 없어! 앞으로 그 속도를 어기는 놈은 장사병을 막론하고 영창으로 보내, 그리고 도로에 기름 흘리는 놈들 이것들도 엄벌하도록 해."

태원은 한마디를 기어코 하고 말았다.

“저 참모장님, 장교들은 영창 가는 제도가 없습니다. 재판을 받기 위해 영창에서 대기는 할 수 있어도 벌로 영창 가는 법은 없습니다.”

모두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태원과 참모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쪽은 겨우 밥풀떼기 셋이고 다른 한 쪽은 빛나는 별이 하나였다. 전방 같으면 감히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아, 그래. 그렇다면 장교들은 헌병대 보내지 말고 나한테 보내, 내가 직접 ‘쪼인트’를 까줄게.”

박 장군은 쉽게 말했다. 잘못했으면 또 참모장의 불호령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쉽게 진정되어 일동은 가슴을 휴 하고 쓸어내렸다.

"야, 실장! 장교식당 위생검열을 내일부터 시행하고 매일 나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해!”

장교식당은 민간인들이 운영했다. 물론 기간 사병들이 취사병으로 파견 나가 같이 거들고는 있지만 주체는 민간인들이다. 태원은 이런 경우 과연 군의관이 검열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아무 대꾸 없이 명령을 받들기로 했다. 그러나 속으로 식당 주인이 뭔가 참모장의 비위를 거슬렀구나 하고 진의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매일 장교 식당을 둘러보고 참모장에게 보고한다는 일은 정말 쓸데없고 고달프고 번거로운 일일 것이다. 참모장의 개인적인 화풀이 도구가 되는 것 같아 무척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