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날] ‘40세의 주례’ 나의 보람!
[스승의날] ‘40세의 주례’ 나의 보람!
  • 김차식 기자
  • 승인 2020.05.14 09: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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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눈부신 경제계발에 따른 성장 규모가 증대
기능직 확보로 산업체특별학급과 산업체부설학교의 설치법 제정
교육과정은 관계법규에 따라 이수단위 1/3이 현장실무로 대체
1994년 1월5일 황제예식장 1층 송실에서 40세 나이로 첫 주례
한국청소년연맹 한별단의 자연보호활동 모습. 둘째줄 왼쪽 첫 번째가 백정자 학생.  김차식 기자
한국청소년연맹 한별단의 자연보호활동 모습. 둘째줄 왼쪽 첫 번째가 백정자 학생. 김차식 기자

 

1980년대는 눈부신 경제개발에 따라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규모가 커지면서, 산업화(産業化)가 급진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교직에 첫발을 내딛어 제2세 교육을 위해 교육현장에서 훌륭한 스승이 되고자 했던 초임 시절이 시작된 때였다.

산업현장에는 기능직 근로자 수요가 절대 부족하여 이 인력을 확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존 확보된 기능공도 근로조건이 보다 나은 업체를 선호하게 됨에 따라 철새처럼 자주 이직하였다. 이런 이직으로 인한 인력확보 문제가 산업현장 속에서 경제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 시점에 정책적으로 산업현장에서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인력확보를 위해 배움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길을 열었다. 바로 산업체특별학급과 산업체부설학교였다.

오늘날 3D업종을 회피하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하고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당시는 많은 학생들이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못하는 시대였다. 남존여비 사상에 따라 딸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기회도 적었다.

이런 이유로 정상적으로 입학하는 학생의 나이보다 1~2살, 많게는 3~4살이 더 많은 학생이 다수였다. 또, 회사에서는 장기근무를 유도하는 차원에서 1~2년 근무 시킨 후, 선의의 경쟁 결과에 따라 일정 인원만 입학을 시키곤 했다. 어떤 회사는 자체적으로 몇 과목 시험을 쳐서 우수 사원만 입학을 시키기도 했다. 학생들도 1~2년이 지난 후 입학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기업체(주 제품이 섬유)에서는 시골 중학교를 방문하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1명의 입사자라도 인력 확보를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이런 시기 초임교사였던 기자는 하양여자고등학교로 시작, 1981년 4월에 구남여자상업고등학교 산업체특별학급에 부임했다. 청소년 교육의 최일선에서 전인교육과 인성교육을 비롯한 교육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교육과정은 관계법규에 따라 이수단위 3분의 1을 현장실무(회사근무)로 대체할 수 있었다. 3교대 근무를 하게 되는바, 오후 근무조일 경우는 등교를 못하지만 출석으로 인정하는 제도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골 중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소풍 때에는 오전 근무학생은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참석하여 소풍을 즐기고, 오후 근무 학생은 일찍 소풍 장소에 와서 여흥을 즐기다가 중식 후 회사로 출근하곤 했다. 체육대회는 토요일 오후에도 실시를 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의 사기 진작은 물론 여고시절의 추억을 갖게 되었으리라 생각해 보았다.

1985년 3월 신학기부터는 학생주임 보직을 맡았다.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여고 학창시절의 날개를 펼쳐주기 위해서 타 산업체학교에서는 운영되지 않은 서클(동아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바로 한국청소년연맹 한별단(고등부)이었다. 한별단 단원들은 힘든 회사근무와 학교생활 속에서 틈틈이 시간을 마련하여 유익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국청소년연맹 한별단의 백정자 학생(오른쪽). 김차식 기자

한별단 활동에 강한 의지와 모범을 보여 온 백정자 학생이 있었다. 단원 중 나이가 2살이 더 많았고, 1학년 때부터 활동이 눈에 띄었으며 소속감과 사명감이 남달랐다. 2학년 때는 부단장으로 활동, 어려운 일, 힘든 일 등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언니로서 단원들에게 용기를 주곤 했다.

가정 방문이라는 것은 회사방문이다. 금남 구역으로 되어 있는 기숙사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한창 부모님께 의지하고 어리광이나 부릴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멀리 두고 조직에 매인 생활의 모습에 마음이 찡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서장, 사감선생님의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한없이 기쁘기도 했다. 기숙사 방문 시에 어떤 학생은 미리 정성 들여 준비한 다과를 내놓으며 ‘몇 분이라도 더 계시다가 가세요’라며 손을 잡으며 어리광을 부리던 그 모습과 말들이 지금도 가슴 속 아련하게 떠오른다.

꽃다운 10대, 꿈 많은 소녀시절에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며 배움에 대한 열정 하나로 모든 것을 다 뒤로 했었다. 때로는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주위의 유혹에 못 이겨 입학 때의 결심을 포기하고 퇴사해 학업을 그만두는 학생들도 있었다. 좀 더 지도와 면담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꽉 채운다. 교대근무로 인한 시간적 공백, 식사의 불규칙으로 위장병, 탈진도 발생되기 일쑤였다.

백정자 학생이 3학년 때에 한별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단원들의 건강관리, 퇴사방지, 학교와 학생과의 유대관계 등 언니로서 교량 역할을 했다. 자연보호, 고아원, 양로원 등 위문도 많이 했었다. 대한적십자에서 끼니를 거르고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라면 급식을 제공했는데, 봉사도 하며 뒷정리까지 했다.

산특 7회로 졸업하고, 소속 회사를 퇴사한 후에는 경남 창원에 근무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줄곧 잊지 않고 연락을 해왔다. 필자의 생일 때 찾아오든지 때로는 선물을 소포로 우송하곤 했다. 박사학위 과정 중에 있을 때 연구실로 전화를 내어 건강도 염려해주곤 했다.

혼기가 되어서 ‘수 년간 교제를 해온 사내 사원과 미래를 설계한다며, 예비신랑과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집을 찾아 왔다’고 하였다. 며칠 후 결혼식 날짜를 받아 다시 찾아와 ‘사회구성원의 크나큰 어려움도 극복할 줄 아는 여성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주신 선생님이 계셨기에 저에게 평생에 한 번인 결혼식의 주례를 부탁한다’고 했다.

백정자 학생에게는 1, 2, 3년 담임을 맡은 적도 없고 신랑의 은사도 아니다. 서클 지도교사이며 더구나 아직 40세의 나이이기에 주례를 본다는 것은 너무 이른 감이 들어 극구 사양하고 돌려보냈다. 이후 수 차례 간곡한 부탁에 주변의 고견을 들은 후, 두 사람의 무궁한 앞날을 축복해 주기로 결심했다.

1994년 1월 5일(음 11월 24일) 황제예식장 1층 송실에서 양가 부모님, 일가 친척, 세 분의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40세의 나이에 신랑 문차근 군과 신부 백정자 양의 백년가약을 맺는 첫 주례를 보게 되었다.

주례사는 화학 전공자답게 물의 성질(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가 과부족없이 만날 때만 물이 되듯이, 부부가 되어야 함)과 일심동체, 충효정신에 대해 언급하였다.

열성적인 외침, 뿌려 놓은 씨앗이 이제 사회 구석구석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밑거름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있음을 볼 때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많은 제자들에게 주례를 보게 되었다. 인연이 된 제자들아! 모두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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