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날] 나의 은사(恩師) 김동식 선생님
[스승의날] 나의 은사(恩師) 김동식 선생님
  • 도창종 기자
  • 승인 2020.05.14 09:4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마다 맑고 푸르른 가정의 달 5월이라고 하지만, 오후 가까운 공원에 산책이라도 가면, 땀이 이마에 맺힐 정도로 따뜻해졌다. 스승의 날, 기자의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이셨던 김동식 선생님이 생각난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로 까까머리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분이다. 참되고, 바르게, 정직하게 생활하라고 가르침을 전하신 삶의 스승님.

김동식 선생님은 기자가 중학교 입학하기도 전 이미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 작)라는 전국적인 영화로 스타가 되신 대단한 분이었다.

김동식 선생님(왼쪽)과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신영균 감독.  도창종 기자
김동식 선생님(왼쪽)과 신영균 감독. 도창종 기자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이윤복을 키운 김동식 선생님 기사 보기

 

1967년 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하던 날 선생님은 명덕초등학교에서 청구중학교로 첫 부임하면서, 우리 1학년 3반 담임(擔任)을 맡으셨다.

입학식 날 처음 본 선생님의 인상은 키와 덩치가 엄청 크시고 가슴도 넓으셨다. 유도를 하시기에 체육 선생님인줄 알았는데 국어 담당이셨다. 스타의식이 강했고, 강한 카리스마로 항상 우리 개구쟁이 얄개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선생님들은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라는 속담처럼 체벌(體罰)을 하셨는데, 그 시절의 매는 그야말로 ‘제자 사랑의 매’였다.

선생님의 ‘사랑의 매’는 좀 특별했다. 수염이 유난히 많았던 선생님은 간단하게 벌을 줄 때 학생들의 얼굴을 넓은 두 손으로 잡고, 긴 턱수염으로 이마에서 코끝까지 내리 긁었다. 그러면 얼굴은 엄청 화끈거리고 따가워 2, 3일가량 세수할 때면 고통스러웠다. 그 ‘사랑의 매’는 유별나고도 독특한 선생님만의 제자사랑 스킨십이기도 했다. 강한 벌을 줄 때는 선생님은 “나무에 가위질하는 것은~~” 하면서 가운뎃손가락으로 위쪽 이마를 때리신다. 그러면 학생은 곧바로 차렷 자세로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1967년 청구중 1학년 3반 가을소풍 사진.(오른쪽이 김동식 신생님)  도창종 기자
1967년 청구중 1학년 3반 가을소풍 사진.(오른쪽이 김동식 신생님) 도창종 기자

 

옛날에는 가정방문이라는 학교 방침이 있어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해 부모님과 상담했다. 교사는 학생 가정생활을 파악하고, 학부모는 학교생활을 선생님을 통해 듣는 기회였다. 학생 장래와 교육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기자의 가정방문 날, 선생님 자전거 뒤에 타고 15분 정도의 거리를 2시간 넘어 집에 도착했다. 길을 가다 불량청소년, 비행, 가출청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훈계, 선도(善導), 격려 하시느라 일정이 점점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우리들은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늦으시면, 청소년 선도하다 오신 걸로 알고 있었다.

우리들은 매일 일기를 꼭 써야 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닌 일기장에 밝힌 계획과 약속을 제대로 이행 실천했는지 매일 검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실천이 안 됐으면 점심시간 운동장에 나가 놀지도 못 했 다. 선생님도 우리와 함께 늘 교실에서 도시락을 드시며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이면 용의검사도 했다. 당시는 먹을 물도 부족해 씻지도 못한 친구, 씻기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들이 책상 위에 올라가 속옷만 입은 채로 서 있으면, 선생님은 몸에 상처가 없는지, 몸은 깨끗한지, 속옷은 자주 갈아입는지, 일일이 청결검사를 하면서 깨끗한 몸을 강조하셨다.

유도부 특별활동 시간.  도창종 기자
유도부 특별활동 시간. 도창종 기자

 

우리들의 학교 생활은 ‘가정연락부’를 통해서 부모님께 전달되었다. 매일 종례시간 선생님이 불러주는대로 공책에 적어 부모님께 보여주고, 확인 도장을 받아오는 소통(疏通)공책이었다. 가정통신문은 학생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행동을 반복적으로 주지시킴으로써 바른 행동, 바른 생활태도가 습관적으로 몸에 배게 하는 선생님만의 정신교육이었다.

1. 부모님에게 효도하기 2. 친구 간 우애 지키기 3. 결석하지 않기 4. 목욕 자주 하기 5. 나라 사랑하기 등등. 마지막에는 길조심, 차조심, 사람조심이었다. 매일 종례시간 정신교육으로 우리는 다른 반보다 늘 하교시간이 30분~1시간 늦었다. 우리 반은 1년 동안 선생님의 이런 교육 담금질을 통해 더 성숙되고, 단련되었다.

선생님은 까까머리 얄개 우리들의 앞날을 위해 뿌리를 깊게 잘 심어 주려고 노력했고, 일기와 가정연락부를 통해 효도, 우정, 올바른 학교생활, 인내와 배려를 가르쳤다. 수업시간에 들어오면 항상 칠판 위 국기(國旗)에 대해 경례를 하시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평생을 불량청소년, 비행청소년 선도를 하다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지금은 돌아가시고 우리들 곁에 계시지 않지만, 저 하늘에서 우리 제자들에게 이렿게 이야기 하시는 것 같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비록 지위가 높지 않게 살았더라도, 비록 가난하게 살아왔다 하더라도 너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매순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은 남에게 봉사하고, 배려하며 살아라.”

이렇듯 선생님은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계신다. 스승의 날을 맞아 김동식 선생님에게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