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㉕아프다고 쉬면 일은 언제하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㉕아프다고 쉬면 일은 언제하고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5.07 12:3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간요법과 조약(造藥)으로 버티다가 회춘당약방과 일성병원으로
고된 농사일에 남은 것은 골병

육지 속 외딴 섬 소평마을은 접근성 좋은 옥답(沃畓), 맑은 공기, 풍부한 일조량, 딱실못과 기계천으로부터 흘러드는 넉넉한 물로 농사짓기에 그만이었다.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고 흐르는 ‘큰거랑’은 마을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이들은 농사일 품앗이에 익숙해져 있어서 무슨 일이든 서로 돕고 자신의 일인 양 팔을 걷어붙였다. 거기에 마을 복판에 예배당이 있어서 영육 간에 행복한 삶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잔병치레 하면서 크고 어른은 늙어 병들기 마련이다. 거기다 가난하기까지 했으니 어른 안 아프면 아이 아프기 예사였다. 아이가 신열이 있는데도 괜찮을 줄 알고 미련을 대다(버티다)보면 아이는 밤중에 경기(驚氣)를 했다. 아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온 식구는 놀라서 잠을 깨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맏이는 ‘잘 따는’ 아주머니를 부르러 부리나케 골목길을 내달렸다. 인중과 손톱 위 첫마디 관절의 정맥을 바늘로 찔러 피를 조금 내면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의식을 되찾았다. 날이 밝아 병원으로 나서기까지의 시간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가난한 농부들의 식탁은 소박하고 단출했다. ‘짠지(김치)’가 떨어지면 겉절이를 해서 먹고 여름이면 상추쌈 하나로 족했다. 보리밥에 반찬은 밥을 먹기 위한 간에 불과했다. 그래서 반찬을 ‘해먹고’라고 불렀다. 농부들은 영양이 부실한 상태에서 과한 노동에 시달리다보니 몸이 남아나지를 못했다. 이를 두고 황수관 박사는 “성인병은 없었으나 골병이 들었다”며 좌중을 웃겼다. 술김에 일하다 술에 찌든 사람, 새벽부터 마을 앞 미나리꽝 맡에 쪼그려 앉아 담배 피다 헛구역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은 보리밥만 먹다가 어쩌다 쌀밥을 얻어먹으면 기름진 음식에 위장이 놀란 모양인지 설사를 해댔다. 밤새도록 변소에 들락거리고 나서 이튿날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이 뻐끔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눈이 십리나 들어갔다” 며 쌀로 흰죽을 끓여 먹였다.

마을사람들은 치통은 싼값에 야매로 하는 ‘공치과’를 찾았다. 공 씨는 자전거로 마을을 순회하면서 충치를 뽑고 틀니를 맞춰주었다. 그에게 진료를 받은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고 말할 때 입맛을 자주 다셔서 단번에 표가 났다.

1974년 봄나들이 나선 소평마을 사람들,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정재용 기자
1974년 봄나들이 나선 소평마을 사람들,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정재용 기자

어떤 사람들은 병이 잦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조상신이나 귀신의 짓인 줄로 생각했다. 그러면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굿판을 벌였다. 굿은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해서 밤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구경했다. 북과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대나무를 쥔 무당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주문을 쉴 새 없이 외는 도중에 요령도 흔들었다. 조상의 혼령을 달래 보내는 의식이었다. 무당은 객귀(客鬼)를 쫓는다며 바가지에 담아 온 냉수를 머금었다가 환자의 얼굴에 뿜고 부엌칼을 가져오게 해서 환자 머리 주위를 휘젓다가 마당으로 던졌다. 그리고 칼 있는 데로 다가가 칼로 열십(十)자를 긋고 땅 바닥에 꽂았다. 바가지를 칼자루 위에 덮어씌운 후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쿵작거리는 소리는 지붕을 타고 넘어 골목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밤잠을 설쳐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은 예배를 드렸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마귀권세 힘써 싸워 깨쳐버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앓던 사람이 마시면서 흘린 한약이 찬송가에 얼룩을 만들었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민간처방을 그대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내기하느라 손목이 아프면 “자갈풍이 내렸다”며 무명실 가닥에 손가락 한 마디 간격으로 매듭을 지어 손목에 둘렀다. 목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생목 개다”라고 했는데 그때면 지푸라기 목걸이를 해서 목에 걸고 다녔다. 음식을 먹고 체하면 등을 두드리고 양 엄지손가락 첫마디를 바늘로 땄다. 아랫입술에 염증이 생겨 당나발처럼 부풀어 오르면 “죽은피를 거머리에게 빨리면 낫는다”며 징그럽게 붙여 다니는 아이도 있었다.

병원 문턱이 높아서 집집마다 조약(造藥)을 많이 썼다. 배가 아프면 쑥을 찧어 쑥물을 마시고 구운 기와를 천으로 감싸 배 위에 얹었다. 소풀(소꼴)을 하다가 낫에 왼손가락을 다쳤을 때는 급히 쑥을 뜯어 상처에 대고 오른손으로 꽉 잡아 지혈시켰다. 집에 와서는 ‘아까징끼(머큐로크롬)’를 바르고 그 위에 갑오징어의 뼈를 갉아 상처에 뿌렸다. ‘오도뼈(오도독뼈, 오돌뼈)’라고 불렀는데 예닐곱 살 아이 손바닥을 펼쳤을 때 크기의 타원형 꼴이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오리의 혀 빼내 말려 놓았던 것을 삶아서 마셨다. 배와 겨울보리를 뿌리째 뽑아서 냄비에 함께 넣고 끓여 꿀을 타서 마시면 효험이 있었으나 돈이 드는 게 흠이었다.

상비약품 통에는 아까징끼 외에 손틀 때 바르는 맨소래담, 벌레에 물렸을 때 바르는 안티푸라민, 반창고, 소독용 알코올, 약솜과 대나무로 만든 핀셋이 들어 있었다. 유한양행에서 만든 안티푸라민은 인기였다. 뚜껑에 하얀 캡을 쓴 간호사 그림이 멋있었다. 멘소래담이 바닥이 나면 부르터서 갈라진 손을 요강 안 오줌에 담갔다. 살림살이가 조금씩 펴지면서 어린 자녀들에게 원기소나 에비오제 따위의 영양제를 먹이는 가정도 늘어갔다. 둘 다 생콩가루의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맛이었다.

가운데 전봇대 뒤로 보이는 2층 건물이 과거 일성병원이 있던 곳이다. 일성병원은 광제의원을 거쳐 지금의 성진의원에 이르렀다. 왼편에 보이는 신호등 길을 따라 승용차로 5분 정도 가면 양동민속마을이 나타난다. 정재용 기자
가운데 전봇대 뒤로 보이는 2층 건물이 과거 일성병원이 있던 곳이다. 일성병원은 광제의원을 거쳐 지금의 성진의원에 이르렀다. 왼편에 보이는 신호등 길을 따라 승용차로 5분 정도 가면 양동민속마을이 나타난다. 정재용 기자

당시 안강읍내 유일한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춘 곳은 현재 ‘성진의원’ 자리인 사거리 남동쪽 코너의 ‘일성병원’이었는데, 일성병원보다는 원장 김일돌 씨의 이름에서 따온 ‘이또리병원’으로 널리 통했다. 대부분이 한의(韓醫)던 시절에 양의(洋醫)는 인기였다. 진료과목 개념도 없고 단지 “효험을 서서히 보려면 한의, 즉시 보려면 양의”가 기준이었다. 김일돌 씨는 안강읍의회 제3대(1960.12.~1961.5.) 의원을 지냈다. 1980년대 들어 일성병원은 ‘광제의원’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약국은 사거리에서 북부리 방향으로 전봇대 하나 간격으로 떨어져 왼편에 있는 ‘회춘당약방’이 소평마을 사람들의 단골 약국이었다. 큰 수술이 필요하거나 중한 병은 ‘경주기독병원(현재 경주동산병원)’이나 김종원(1914~2007) 원장이 있는 ‘포항선린병원(현재 좋은선린병원)’으로 가서 했다.

예방접종으로 천연두는 사라졌으나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등 다른 전염병은 뉴스를 타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는 물을 끓여 마시기, 파리잡기를 강조했다. 변소 똥통에 할미꽃을 캐 넣으면 구더기가 죽는 것도 그때 알았다. 매년 채변검사를 해서 회충이 있는 아이에게는 무료로 약을 먹였고 아이는 이튿날 구제된 회충 수를 보고해야 했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6.25전쟁에 살아남고, 고된 노동과 가난과 질병을 이겨낸 역전(歷戰)의 용사들이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