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날] 잊히지 않는 제자 "희생아, 잘 살아라"
[스승의날] 잊히지 않는 제자 "희생아, 잘 살아라"
  • 최종식 기자
  • 승인 2020.05.14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은 행사에서 다시 만난 초임 교사 시절 제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은 행사에서 다시 만난 초임 교사 시절 제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직생활 40여 년 동안 추측컨대 아마 1천 명 이상이 내 곁을 지나갔다. 이들 중에 상당수의 제자들이 지금까지 연락을 취해 오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2015년 정년퇴임 때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제자들을 초대할 수 없어 1970년대 초임 첫 제자, 1980년대 재임 중반 제자, 2000년대 마지막 제자들을 초대하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오랫동안 이어가려면 제자만의 노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중견교사 시절, 모셨던 교장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당시 스승의 날이면 그 선생님께는 장성한 제자들이 30~40명 '떼'로 찾아오곤 하였다. 알고 보니 제자의 생일이나 아기 돌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를 해주고 찾아주기도 하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나도 제자가 결혼할 때면 예식장도 찾곤 하였다. 그 결과 퇴임 때는 교직원 외에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기수별로 축사를 하는 등 결코 남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퇴임식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1980년대 반공웅변대회가 해마다 열렸는데 아무리 연사가 훌륭해도 원고 자체가 나쁘면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없다. 내 원고와 연사가 맞아 떨어져 해마다 군내 웅변대회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을 때 어떤 부모는 딸아이를 선생님 딸로 주겠다는 등 농담도 하곤 하였다. 그런 관계로 오랜 기간을 가까이 하던 여제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관계를 떠나 정말 잊혀지지 않는 제자가 있다. 가정형편이 좋아 담임에게 선물을 주며 식사대접을 하는 가정의 자녀보다, 끼니조차 못 이어 허덕이는 어렵고 소외된 가정의 자녀가 늘 마음에 짐이 되어 잊혀지지 않는다.

1980년대 초 청도초등에서 6학년을 맡았을 때 김희생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희생이는 얼굴에 핏기가 없고 마른 버짐이 피고 핼쑥하였으나 성실하고 착했다. 그런데 어느날 희생이가 갑자기 결석을 하고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님께 연락하고 가정방문을 실시하였다.

사실인 즉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병명이 파상풍이란다. 급히 병원으로 가니 평소와 같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우리를 맞이하였다. 연유를 물어보니 지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내내 방천에 미꾸라지를 잡으러 갔다가 못에 찔려 파상풍 균이 발에 침투하였던 것이다.

희생이 가족은 조부모, 부모, 자녀 3명 등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 모여 사는 대가족이었다. 식구는 많은데 아버지가 폐결핵에 걸려 오랫동안 병석에 있어 경제적으로 궁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 혼자 방앗간 허드렛일을 하며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루에 쌀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에 희생이가 한 푼이라도 보태겠다고 동생들을 데리고 미꾸라지 잡기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는 사고로 희생이마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니 당장 입원비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다가 묘책을 발견하였다. 전교 임시 어린이회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급한 논제거리로 ‘어려움에 빠진 희생이를 돕는 방안’이란 주제로 토론하게 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금으로만 충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장시간 토론 끝에 성금과 함께 쌀을 성의껏 모으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청도초등학교 전교생 수는 25학급에 700명이 넘었다. 한 주 동안 십시일반 모인 현금이 40여만 원이며 쌀이 4가마나 되었다. 전교어린이회장을 앞세워 희생이 가정에 전달하였다. 뜻밖의 사실에 희생이 가족들은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 어머니는 감사의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사리 손들이 위대하였다. 평소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쌀밥과 병원비까지 해결되었으니 감사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십시일반이라고 했던가? 여러 사람이 조금씩만 성의를 표하면 내 주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죽음에서 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 후 희생이는 학교를 졸업을 하고 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의례히 정성껏 편지를 보내왔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전 직원이 학교 뒷산에 있는 약수폭포로 산행을 하게 되었다. 산 입구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웬 허름한 옷을 걸친 아저씨 한 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아이고 선생님!’ 하면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알고 보니 희생이 아버지였다. 다행히 폐결핵이 다 나아서 ‘산불지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도와주셔서 너무나 고마웠다는 말을 수십 번 되뇌며 맞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온 몸에서 온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특별히 잘 한 것도 아닌데 단지 기회 포착을 잘 하여 이웃돕기 성금을 모으도록 유도한 것뿐인데 이렇게 감사해 하니 오히려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여러 선생님 앞에서 나만 칭찬받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던 것이다.

세월이 후딱 몇 년 지나가면서 희생이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졸업하였고 부산에 있는 모 전자기업에 취직을 하였다. 그의 부모님도 셋방살이를 벗어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학교 부근 외곽지에 새 집을 지어 입주하였다. 여동생들도 결혼을 하였다. 해마다 희생이는 간절한 사연과 함께 정성스레 귀한 선물을 잊지 않고 보내주었다. 이제 그러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지만 막무가내였다.

몇 년 후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왔다. 참 기뻤다. 당장 각시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다. 집으로 초대하였다. 신부가 참 덕스럽고 예뻤다. 이제 다 잊었구나 싶었다. 결혼식 날 부산 예식장에 하객으로 참여하였다. 주례로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나의 위치가 주례로는 너무 젊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사양하였던 것이다.

학교 가까이 살고 있는 아버지는 종종 길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럴 때면 ‘아이고 선생님!’과 함께 내 손을 붙든 힘이 어찌 그리 센지 뿌리칠 수 없었다. 이제 희생이는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다고 다 선생님 덕분이라고 하셨다. 만날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지니 이제 의도적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IMF가 닥쳐왔다. 연락이 끊겼다. 일부러 연락을 하는 것도 그렇고 학교를 옮기다 보니 희생이 아버지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무서운 경제 불황, IMF로 인해 애틋한 제자와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그러나 언뜻언뜻 생각나는 제자, 희생이가 어디선가 다시 멋지게 재기하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잘 살아가기를 바라며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가 1999년 12월 31일에 마지막으로 보낸 연하장을 펼쳐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선생님께!

매년 연말이 되면 다사다난했던 일들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고 되새기게 됩니다. 아직 IMF의 된서리에 정신을 못 차려 멍하니 한 해를 쫓기다시피 보낸 것 같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지면을 통해서 한 해의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가오는 기묘년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다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999. 12.31

부산에서 제자 희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