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7)-북파공작원
녹슨 철모 (57)-북파공작원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4.2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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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태원의 아파트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런 경우 전화는 100% 응급환자 발생을 알리는 것이다. 세수를 마치고 채비를 하자 구급차가 도착하였다. 환자가 있다는 장소에 가보니 부대 뒷문에서 방을 얻어 살던 중위 하나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혼수상태였다. 빨리 고압산소통이 있는 병원으로 후송하여야 했다. 우선 인공호흡이 시작되었다. 혼수상태에서 산소공급이 안 되면 뇌가 손상되고 뇌는 한 번 손상되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이런 경우에 인공호흡은 필수적이다. 위생병과 태원은 교대로 인공호흡을 하며 야전병원으로 달리고 있었다.

인공호흡을 하며 가다 보니 유선영 소위 생각이 났다. 남의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태원은 선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공호흡이 시작되고 얼마 가지 않아 환자는 호흡과 맥박이 되살아났다. 이제는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건 운전병의 임무다. 환자를 병원 군의관에게 인계하고 기진맥진해서 기둥에 기대 앉았는데 유 소위가 콜라 한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왔던 때가 생각이 났다. ‘어머! 이러다가 실장님이 먼저 돌아가시겠어요.’ 그녀는 유치원 보모가 원생을 대하듯 포근하게 그를 맞아 주었다. 평소의 쌓였던 감정이 그때를 계기로 표출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감정이 만들어진 것일까? 아무튼 순서는 잘 모르겠다. 응급환자를 계기로 갑자기 그는 그녀에 대한 따뜻한 가슴을 느끼게 된 것이다.

자다가 일어나 환자를 본 당직군의관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더벅머리의 전형적인 군의관 모습이다. 가운은 입지도 않고 잠옷으로 입고 있던 파란 수술복 차림으로 환자를 한 번 보더니 “O2, 챔버에 넣어” 라고 간단히 한마디하고는 가버렸다. 같은 군의관인 태원을 보고도 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잠자는 자신을 깨운 그가 원망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태원은 속으로 저런 놈들 땜에 '군의관이 군인이라면 전봇대에 꽃이 핀다는 말이 있지’ 라고 욕을 하며 환자를 인계하고 간호사를 보니 평소에 안면이 있는 이난아 중위였다. 그녀는 선영의 친구여서 태원에게는 딴 간호장교보다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소위가 아니고 어느새 진급하여 중위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유선영도 중위가 되었을 것이다. 한동안 그녀와 이상하게도 연락이 안 되었는데 그 사이에 벌써 이런 변화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제서야 둘은 수인사를 나누었다.

“진급하셨네요. 축하합니다. 그러면 이춘, 유선영 소위도 함께 진급한 거죠?"

"물론이에요. 우리 셋은 국간 동기니까요.”

“요즘 유 소위 아니 유 중위는 잘 안 보이네요?”

"아니, 모르고 계셨어요? 벌써 전출 간지 며칠 되는데.......”

태원은 화들짝 놀랐다.

"어디로?"

"59후송병원으로 갔죠.”

대답하다가 그녀는 당황한 듯 말을 고쳤다.

“네....춘이는 59로 갔고요. 선영이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2군 사령부 지역으로 가긴 갔는데 거기서 다시 어떤 병원으로 배속 받았는지는 저도 몰라요.”

태원은 뭔가 좀 석연치 않았지만 일단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갈 것이라고 좋게 해석하고 부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연락을 받아 가느라 나에겐 연락을 못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군대란 항상 그래, 전날 갑자기 명령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온갖 의심을 그렇게 떨치며 귀대하였다. 자신의 전출은 군의관 정기이동 때니까 시간이 좀 더 흘러야겠지 하고, 그는 선영의 연락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형님, 우리와 함께 서울 가서 한 잔 하죠. 어차피 저흰 토요일 서울 가는 날이고 형은 형수도 안 계시고 적적하시잖아요.”

"그래요. 조카 탄생 턱도 하고요.”

나머지 소위들이 합창을 했다.

일행은 불광동 시외버스 종점에 내려 부근의 대폿집으로 찾아들었다. 작부 둘이 있는 집인데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일행은 화덕 주위에 둘러 앉아 막걸리를 따르고 있었다. 계집애 둘은 철따구니가 전혀 없어 뵈는 전형적인 대폿집 작부 모습인데 그다지 밉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하나는 그 중에서도 순한 모습이었고 하나는 빤질빤질하고 성질도 있어 뵈는 모습이었다.

"아유, 장교 오빠들 잘 오셨수? 환영해요.”

"야! 이년아, 뭘 보고 우릴 군인이라고 하는 거니?”

태원이 장난조로 시비를 걸었다.

“척하면 척이고, 쿵하면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 그걸 왜 몰라요?"

"오빠들은 군바리하고도 땅개잖아요?"

"야, 제발 똑똑한 체 좀 말아. 불광동에서 얼씬거리는 놈들이 공군이 있겠어? 해군이 있겠어? 모조리 육군 땅개밖에 없지.”

처음부터 그들은 죽이 척척 맞았다. 안주가 미처 나오기도 전에 대포로 한 대접씩 들이켜고 이내 그 잔을 작부들에게 돌렸다. 마음이 푸근한 건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사양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전부 R.O.T.C 명문대학 출신 장교들로 인물이나 키도 훤칠하고 점잖은 모습이니 작부들은 그녀들의 직업을 떠나서 이성으로서도 호감이 가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외모에서도 뭔가 평범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저 큰 오빤 이상한 부대 있지?"

낯짝 반질반질한 년이 뒤늦게 나온 꼬막을 안주로 집으며 물었다.

"그래! 이년아, 나뿐 아니라 여기 있는 놈 모두 그런 놈들이야.”

태원이 허풍을 떨자 계집애들은 일부러 속는 체하는 건지 눈을 반짝거리며 다시 말을 붙였다.

“자기! 너무 이년 저년 하지 마. 듣는 년들 기분 나쁘잖아. 자기는 인상도 무섭게 생겼는데 욕까지 하니까 정 떨어져.”

반질한 얼굴이 웃으며 대꺼리를 했다.

"야, 나도 왕년엔 여기 이 새끼들처럼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었어.”

"근데 왜 그렇게 되었어요?"

정말 흥미가 있는 듯 순해 보이는 계집애가 물었다.

"하하하! 그건 바로 네 년들 때문이야.”

“오빠, 오빤 오늘 우리 첨 보잖아? 근데 왜 우리 때문이야?"

"그래, 이 오빠도 전엔 순하고 착했지. 그런데 날 좋아한다던 년이 날 버리고 도망간 거야.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단 말이지. 그래서 이 오빤 군에 들어와 특수부대로 자원해 들어간 거야.”

"오빠 많이 울었겠네?"

“물론이지. 울기만 했겠니? 죽으려고도 했지. 한강 인도교에 서 보니 강물이 너무 차 추워서 안 되겠더군, 차에 뛰어들어 죽으려니 운전수가 나 때문에 형무소 갈 것이 미안하고, 아파트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니 조각 난 시체를 치우는 인부들에게 욕 들어 먹겠고.......... 하여간 뭐 그래서 이 오빤 북괴 놈들 손에 죽기로 한 거야. 그래서 특수부대에 들어갔어.”

“그럼 여기 있는 장교들 모두가 애인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인가?”

"야. 그러니까 넌 술집 작부밖에 못 되는 거야. 이 친군 서울대 사학과, 저 친구는 연세대 경영학과, 저기 저놈은 한양대 기계학과 출신이야. 그리고 저 새낀 성대 상대 출신이야. 저 새끼들 다들 제 애비 잘 만나 빽 써서 군단 연락장교로 빠진 놈들이야. 오늘도 늬 집 나가면 바로 그 애인들과 흘레붙기로 약속된 몸들이야. 나하고 저놈들하고는 질이 다른 거야. 알간?”

빤질이와 순진이 두 계집은 진담인가 농담인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하긴 같이 간 학군단 출신 소위들도 비록 술이 취해서 저러긴 하겠지만 평소에 보지 못하던 태원의 모습이 재미도 있고 뭔가 사연도 있어 흥미 있게 듣고 있었다.

"야, 너희 오늘 우리가 왜 여기 왔게?"

"그야 우리 예쁜이들하고 술 먹고 연애하러 왔지 뭐?”

빤질이가 껌을 짝짝 씹으며 말했다.

"그래, 너 잘 안다. 오늘 너희하고 진한 연애 한번하고 싶다. 오래 남쪽을 떠나 있었더니 남조선 씹이 너무 그립더군.”

“왜 걔 네들 건 맛이 없어?”

"아니! 니네들보다 더 맛이 있어”

"그럼 왜 우리 것이 그립다는 거야?"

“맛이야 없어도 신토불이 아니야. 우린 우리 것에 입맛이 배어 있거든. 나는 맛보다 우리 것이 더 좋아. 사실은 말야. 내 솔직히 얘기할 게, 우린 이북 가도 크게 활약을 못 하고 온다고, 김신조처럼 왕창 할 수가 없어. 놈들의 사회구조도 그렇게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고 양놈들도 못하게 지랄하니까 우린 가서도 놈들의 목이나 몇 개 베어 오든지 아니면 자그마한 다리 폭파, 건물 불 지르기, 서류 훔쳐오기 정도로 왔다간 흔적만 남기고 오는 거야. 그러고 오느라 걔네들 것 먹고 올 시간이 없는 거야. 안타까운 내 맘 알겠어?”

"그럼 왜 이북 가는 거야?"

“놈들에게 경고를 주는 거지. 언젠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김일성의 목도 따 올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지. 결정적일 땐 가끔 큰 거 한 건씩 하는데 그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그곳에 심어져 있는 우리 ‘고첩’들이 하는 거지.”

“그럼 오빤 부대서 주로 뭘 하는 사람이야?"

“내가 말했잖니? 철책선 들락날락한다고, 평소에는 산속에서 곰을 키우고.”

“아니 곰은 왜요. 그걸 키워 잡아먹고 힘내는 거유?”

"아, 곰은 우리 특수공작원 애들을 말하는 거야. 난 애들을 데리고 평소에는 산에 살면서 훈련을 시키는 거지. 말하자면 난 어미 곰인 셈이지. 니들이 이렇게 가랑이 벌리고 오입하면서 즐겁게 살고있는 건 바로 나 같은 숨은 애국자들 덕이야. 니 년들 그동안 많은 군발이들과 흘레붙어봤지?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처음일 거야. 오늘 영광으로 알고 뒷물하고 준비해.”

태원이 하도 설레발을 치니 이윽고 말하는 자신도 주워들은 이야기가 진짜 자신의 이야기인 양 말이 술술 잘도 풀려 나왔다. 그의 입대 동기가 ‘여자에게 바람 맞고’ 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 여자가 무엇을 상징하느냐가 문제이지 그것이 실제 여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또 특수부대에 들어갔다는 것이 과거의 표시라기보다 어쩌면 태원의 미래를 먼저 예언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의 계획을 과거 형식으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하여간 일동은 거짓말인 줄 아는데 뭔가 진실이 또한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일동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밑도 끝도 없이 하다가 일어섰다. 소위들은 태원의 말대로 이미 갈 곳이 정해져 있으므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형님, 저희들은 갑니다. 얘들아 잘 모셔.”

너스레를 떨며 그들은 시내로 들어갔다. 태원은 두 여자와 젓가락 장단에 노래를 부르다 취해서 정신을 잃었다. 꿈에 선영을 만났다. 모습은 나타났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속이 답답하였다. 뭔가 할 말은 있는 듯했는데 표현을 안 한다. 다음 장면에는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만 들린다. 말은 하지만 내용은 알 수 없다. 안타까운 내용들이다. 기분도 언짢고 목도 말라 눈을 떠보니 생전 처음 보는 방이었다. 옆에 누가 누워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제 밤 술을 같이 마시던 순하게 보이는 그 계집애였다.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자리에 눕는데 그녀가 스스로 안겨 왔다. 자다가 무심코 하는 짓인지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 그는 모른 체하고 누웠다.

“외로워 보였어요. 어제 왜 그냥 가려고 그랬어요?"

“야,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어디긴... 술집 뒤 켠의 제 방이에요, 왜 저하고 있는 게 싫으세요?"

"그건 무슨 말이야?"

"절 두고 그냥 잘도 주무시길래..........”

"그럼 넌 나하고 뭘 하자는 얘기냐?"

“응, 그래요. 당신은 어제 저한테 외롭다는 신호를 보냈고 저는 그래서 당신을 제 방으로 모신 거예요.”

“도대체 내가 너한테 무슨 신호를 보냈다는 얘기야?"

“전 첫눈에 장교님이 여느 사람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뭔가 사연이 있는, 하여간 무척 괴롭고 외로워 보였어요. 당신은 성격상 과장하거나 너스레를 떨 사람은 아녜요. 어젯밤 특수부대 이야긴 당신의 소설이죠. 하지만 전 그 소설의 의미를 이해했죠. 그 소설이 바로 당신이 저에게 보낸 신호였죠.”

"그건 어떻게 알아?"

“첫눈에도 그렇게 보였고 어제 같이 있던 후배들의 눈초리에서도 그런 걸 느낄 수가 있었어요.”

"그럼 넌 괴롭고 외로운 내 맘을 풀어주겠다는 거냐?”

"그러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너 나하고 같이 죽을래?"

이 말을 듣자 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둘은 평소부터 자주 만나 온 연인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섞고 있었다. 태원의 아래 누운 여자가 선영으로 보였다. 선영은 먼저 영천에 갔을 텐데 왜 자신이 서글퍼지고 조바심이 나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선영아’ 이름을 부르며 태원은 그녀의 몸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둘은 뒹굴며 핥으며 몸을 함께 섞어갔다. 다음 날 새벽 태원은 그녀 몰래 그 방을 나와 도망치듯 아파트로 돌아왔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선영이와는 마치 헤어진 사이처럼 느껴졌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마 술이 덜 깬 탓이거니 하고 태원은 샤워를 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