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아버지도 남편도 아들도 멀티슈퍼맨
[어버이날] 아버지도 남편도 아들도 멀티슈퍼맨
  • 이수이 기자
  • 승인 2020.05.07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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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세상 가장 멋진 슈퍼맨으로 살아간다
1975년 달성공원 - 아버지와 오남매
197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아버지와 오남매. 이수이 기자

 

중년의 딸이 본 '늙은'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어쩌다 손주들이 외갓집에 온다고 하면 당신은 평소에는 잘 드시지도 않는 소고기를 사다 놓고, 손주들이 먹을 과자도 사다 놓는다. 언제 도착할지도 모를 딸을 기다리느라 삽짝거리 밖까지 나와 오가는 차에 목을 빼고 기다린다. 돌아오는 날 대청마루 끝에는 이미 보따리가 여러 개 자리하고 있다. 시골장서 짰다는 참기름, 들기름, 사위 좋아하는 고추부각, 물만 주고 키웠으니 안심하고 생채 먹으라며 싸둔 상추, 풋고추, 애호박, 가지 등등 다 먹지도 못할 만치 실어 줘야 한다. 그래 놓고도 돌돌 만 지폐를 딸의 손에 슬그머니 쥐어주며 "애들 고기 사멕여" 한다.

 

중노년에 들어선 남편은 또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침부터 세 살짜리 손녀와 영상통화를 한다. 아이는 계속 뭐라 뭐라 하는데, 남편은 "뭐라고? 뭐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서로 동문서답을 주고받는다. 

“할아버지, 콩순이 냉장고 사주세요.” 

발음도 잘 안 되는 꼬맹이가 할아버지에게 콩순이를 주문한다.

“어, 알았다 알았어.”

전화를 끊자마자 다음날 새벽 손녀의 집 문 앞에 갈 콩순이 냉장고를 주문해 놓고는 택배아저씨가 낼 아침 갈 거라고 제 엄마의 핸드폰에 문자로 알려준다.

 

우리 아이 둘을 키울 때는 아빠는 너무 바쁜 사람이고, 밖에서 돈 벌어오는 사람이었다. 캠핑을 한 번도 못해본 것, 낚시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것, 그리고 남들처럼 여름휴가를 다함께 가 본 적이 없는 것을 자식들은 자라면서 늘 불만처럼 얘기했었다.

 

1997년 달성공원 - 남편과 남매
1997년 또다시 대구 달성공원.  아버지가 된 남편이 남매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수이 기자

 

가정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대한민국의 가장들,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에게 경제적인 헌신을 아끼지 않고, 어떠한 위험으로부터도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전통적인 가부장 하에서의 모습이었다. 전통적인 가족상이 많이 변화한 지금도 아버지의 이미지에 대한 원형은 그대로 남아, 요즘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는 소외되고 이해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이 생기기도 한다.

직장에서의 상명하달식 사회관계나 직장상사로서의 수직적 위치에 익숙해 있다가 가정에서도 이를 적용되는 경우가 생기면 크고 작은 갈등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서 얻은 피로 탓에 집안에서는 주로 휴식만 고집하다 비난들 받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경우는 특별히 아버지가 나쁘다기보다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컸었다.

 

2018년 달성공원 - 아들 내외와 손녀
2018년 대구 달성공원은 아버지가 된 아들이 아내와 딸을 데리고 왔다.  이수이 기자

 

요즘 젊은 아버지들의 모습은 어떤가.

자녀들과 게임, 운동은 물론이고, 육아까지 담당한다. 서열만 유지한 채 반쯤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일부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자녀가 놀다가 어머니한테 들켜서 부자가 나란히 꾸지람을 듣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다른 애들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똑똑하셨다. 사춘기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고, 너무 구식이거나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처졌다. 그러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본 아버지는 의외로 좀 알고 계시고 경험이 많으시니 의견을 물어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자식을 키우는 어른이 되었을 때, '내 아버지였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쉰 넘은 나이가 되어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되니 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계셔서 모든 걸 말씀드릴 수만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것 같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다.

내 아버지는 그랬다. 시험 기간이 되면 계란 한 판을 삶아 놓으시고 옆에 앉아 껍데기를 까주셨다. 요점 정리를 싹 다 해주셔서 암기과목 공부는 정말 성적이 좋았다. 남편은 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주고, 엘사공주 스티커를 함께 붙여주고, 상어가족 노래를 불러준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도, 남편도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식들 앞에서 참 멋진 삶을 살고자 한다.

남편은 손녀와 더 재미나게 놀고 싶어 아이가 좋아하는 유튜브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혹시라도 나이 들어 보일까봐 밝은 색들로 옷을 입고, 요즘 아이들의 말들을 배우기도 하며, 매일매일 셀카를 찍어 sns에 올려준다.

내 아버지도, 남편도 그리고 아들도 멀티슈퍼맨 아버지로서의 멋진 삶을 대물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