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의 '매를 맞다'
정영선의 '매를 맞다'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06.03 07:52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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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의 ‘매를 맞다’

 

냉동실 문을 여는데

순간, 아찔하다

묵직하고 단단한 것이 발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발을 움켜쥐고 절뚝거리다가

가만히 들여다본 물체

비닐봉지에 담긴 주먹만한 고깃덩이다

 

물렁물렁하던 살점도 화를 내니 무섭구나

냉동실에 쑤셔 넣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한심한 주인에게 호된 매질을 하는구나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냉동실을 정리한다

모처럼 환한 세상으로 나온

나물 뭉치 생선 뭉치 떡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나를 나무라고 있다

 

제발 살림 좀 잘하거라

 

계간 《불교문예》 2020년 봄호

 

코로나19로 의도치 않게 냉장고 다이어트를 시켰다. 덕분에 나는 큰소리 한번 쳤다. 사재기 선수라는 불명예가 준비성 있는 주부로 거듭난 것이다. 대체 무슨 심리일까. 냉장고가 미어터지도록 식재료를 쟁여놔야 직성이 풀린다. 필요한 만큼만 사라는 남편의 잔소리는 우이독경. 나들이를 가더라도 그 지역의 특산물 한두 가지는 반드시 산다. 관광객으로서 미덕의 자세란 억지논리까지 편다. 오일장이 서는 동네로 이사 온 지 3년째다. 한 장만 걸러도 궁금하고 서운하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주섬주섬 사와선 냉동실에 모셔둔다. 비상식품이란 이유의 꼬리를 붙인다. 사람은 작은데 왜 그리 통이 크냐는 핀잔을 귀 따갑게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

‘제발 살림 좀 잘하거라' 나를 일갈하는 것 같아서 움찔 놀란다. 주부가 읽는다면 그래그래, 마치 자기 이야기인 듯 공감하리라. 고깃덩이에 발등 찍힌 일화를 ‘매를 맞다’란 고백적 형식을 취하여 시로 형상화시켰다. ‘물렁물렁하던 살점도 화를 내니 무섭구나’ 꽁꽁 언 비닐봉지 뭉치가 무기로 돌변하면 정말 아프다. '한심한 주인' 그런 변을 당한 게 한두 번이랴. 숨 쉴 여지를 마련해두는 것이 효율적이란 전문가의 조언을 귓등으로 흘린다. 불시에 손님이 온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마트가 즐비한데도 말이다. ‘나물 뭉치 생선 뭉치 떡 뭉치’들 느닷없는 자가 격리 중에 요긴하게 쓰이지 않았을까? 무릇 살림 잘하는 주부라 자화자찬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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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환 2020-06-04 07:13:55
어쩌면 꼭 우리 냉장고를 보는것 같네요 -
물렁물렁하던 살점도 .... 재미있고도 멋진 표현들 -
좋은시 감상의 기회를 주어서 고마워요 -

장경태 2020-06-03 21:34:04
정말 재미있게 쓴 시입니다.
그기에 해설 또한 한술 더
뜨신것 같아
읽는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봉조 2020-06-03 16:09:34
그래서 저는 냉장고를 대용량으로 바꾸지 못하는 핑계로 삼고 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김만태 2020-06-03 13:10:01
시골에 홀로계신 장모님.
오 남매 번갈아 사 온 반찬을
냉동실에 쟁이십니다.
고명딸은 핀잔하는 척 이쁜도둑이 되지요.
그래봐야
이 집 냉동실도 문닫기가 어렵습니다^^"

이갑연 2020-06-03 11:16:01
언니~싱그럽고 푸른 계절에 여왕 입니다~
서울엔 어제 비가내려 시아가 깨끗 하기 그지 없네요~제발 살림 좀 하고살아라 ㅋ~~
나 한테 딱 하는 소리 같습니다~
오늘 하루도 소행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