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례 화엄사 홍매화에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홍백매십정병'을 그리다.
(2) 구례 화엄사 홍매화에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홍백매십정병'을 그리다.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04.13 14: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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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수고는 약 9m, 수폭은 약 4m, 수령은 약 450여 년
-크고 작은 원들이 비눗방울무리로 변해 무지개 하나씩을 품고선 화폭 가득 펴져 나감
새벽 여명 속에 불꽃철럼 피어나는 흑매. 이원선 기자
새벽 여명 속에 불꽃철럼 피어나는 흑매. 이원선 기자

임금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중인환시, 공주의 손에는 장육전(丈六殿)이란 세 글자가 또렷하다. “나무아미타불” 법호를 읊조리는 계파스님은 직감적으로 눈앞의 공주가 죽은 노파의 환생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에 불과한 것으로 입에 올릴 일은 못되었다. 단지 공주의 손에 쓰인 ‘장육전’이란 단어가 특별했고 임금의 요지부동한 마을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에 숙종대왕은 억불숭유 정책임에도 불구 장육전(각황전: 임금님을 깨닫게 했다는 뜻) 중창의 비용일체를 부담한다.

매화나무는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에서 각황전으로 바짝 치우쳐 가지 끝이 추녀에 닿을 듯했다. 천연기념물 제485호(2007년10월 8일 지정)로 수고는 약 9m, 수폭은 약 4m, 수령은 약 450여 년에 이른다. 원래 4구루였으나 셋은 죽고 한그루만 남았다. 여느 매화보다 꽃은 작지만 향기가 진한 것이 특징이다. 꺾어질듯 구부러지고, 낭창낭창 휘어진 가지마다 흐드러진 홍매의 모습이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을 빼박았다. 멀리서보면 붉은색이 짙다보니 뭇사람들은 흑매화(黑梅花) 또는 흑매(黑梅)라 부른다.

오원 장승업의 ‘홍백매십정병’을 보기 전까지의 매화도는 족자 형태의 수묵화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이 휘어지고 구부러진 마디마디마다에 송이송이 핀 백매 또는 홍매에 채색을 입히거나 화제나 시를 적어 넣은 것이 전부인줄 알았다. 그런 상식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 ‘홍백매십정병’다. 중국 장가계, 원가계, 황산 등등을 못 봤을 때의 중국의 수묵산수화가 상상속의 풍경으로 여긴 것과 같다.

어지러운 듯, 흩날리는 듯, 질서를 잃은 듯, 거기에 꿈을 꾸는 듯 비스듬하게 누운 매화나무, 툭툭 불거진 목피와 거무튀튀한 몸통은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앉은 듯 빈틈이 없어 보인다. 더하지도 빼지도 못할 것 같다. 완벽을 가장한 완벽이 아니라 본래부터 완벽했던 것 같다. 마음속으로 몇 송이를 떨어뜨리자 나일론 천에 불씨가 날아 붙은 듯하고 허망하고 그렇다고 몇 송이를 더하자 궁중여인들의 떠구지 위 가체(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 넣는 딴 머리)처럼 부자연스럽다. 어느 날 장미꽃핀을 머리에 꽂은 여인의 부담스러움이 시간에 녹아 정감이 묻어나듯 화려하면서도 순수함으로 다가든다. 아닌 게 아니라 뜬금없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머리에는 그 꽃핀이 있어야 했고 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통념을 깬 매화도, 장승업은 자신이 지닌 천부적인 재주를 바탕으로 늘 탈피를 꿈꿨을 것이다. 흉내의 붓질로 어지러운 삶을 살다 이슬처럼 사라지기에는 가진 재주가 아깝다 못해 허망하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아예 붓을 꺾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애벌레에서 번데기, 나비로의 화려한 비상을 위한 우화등선을 위해 얼마나 고뇌하고 머리를 쥐어짰을까? 보통의 심성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는가 보다,

오원(吾園)이란 호(號)만해도 1세기가량 앞선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을 들어 ‘나도(吾) 원(園)이다’라는 뜻으로 지었으니 오죽이나 괄괄하고 괴팍할까? 술고래, 술 귀신이란 별칭은 당연지사, 창작을 위해 끝없이 삶을 갈구하듯 예술에 절어 살았는지도 모른다. 창작이 주는 불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술의 힘을 빌었는가 보다. 도화서 화원시절 그가 없어지면 곧장 술집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취화선(醉畵仙)의 홍보용 표지가 술병을 쥐고 기와지붕에 올라앉은 모습이다.

'홍백매십정병'을 닮아 보이는 흑매. 이원선 기자
'홍백매십정병'을 닮아 보이는 흑매. 이원선 기자

술에 취한 그가 넓은 화폭 앞에 섰다. 뼈대는 무엇이고 가지는 또 무엇인가? 거에 꽃까지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도 있어야하고 절개도 있어야 하고 향기는 덤이다. 무엇을 어떻게 넣고 또 빼야 할까? 죽일 것은 죽이고 살릴 것은 살린다. 생기는 또 어떻게 불어 넣을까? 경주 금오산을 일컬어 노천박물관이라 말한다. 많은 유물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석공들의 정교한 망치질과 지극정성들이 모이고 모여서 잡석(바위)에 불과했던 돌 속에서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명장들의 노련하고도 섬세한 손길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물이 묻은 붓 끝에 먹물을 더하고, 검은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붓끝이 종지에 담긴 희멀건 물에서 춤을 춘다. 휘젓는 손길을 따라 은은한 송진 냄새가 방안가득 묻어난다. 우듬지에서 출렁이던 술병이 얼마간 속을 비웠는지 중간쯤에서 찰랑거린다. 취한 듯 보이지만 결코 취하지 않은 몸짓에서 우러나는 붓놀림이다. 또 한모금의 술이 목구멍을 따라 벌컥벌컥 뱃구레로 향한다. 정갈했던 상투에서 삐져나온 몇 가닥의 흰머리가 바람도 없는 방안에서 갈 길을 잃어 흐느적흐느적 흔들린다. 머리카락의 끈적끈적한 흔들림을 따라 손길도 덩달아 흔들린다.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다가 좌우로 눕는가 싶더니 찍고, 뻗치고, 리듬을 타듯 부드럽게 때로는 강렬한 터치가 무한으로 이루어지다. 콘도르가 되었다가 벌새로 날아다닌다. 계절을 희롱하고, 검고, 묽고, 위로, 아래로, 중간으로 길을 잡다가 타원형도 그리고, 네모도 그리고, 세모도 그린다. 이윽고 크고 작은 원들이 비눗방울무리로 변해 무지개 하나씩을 품고선 화폭 가득 펴져 나간다.

대장금이나 원수를 용서한 허작을 닮아 인자한 매화꽃, 심통이 들어 뽀로통한 시어머니를 닮아 돌아앉은 매화꽃, 시어머니의 새치름 눈초리에 안절부절 못하는 며느리를 닮은 매화꽃, 인현왕후를 닮아 인후한 매화꽃, 장희빈(장옥정)을 닮아 독을 품은 매화꽃, 양귀비(양옥환)를 닮아 풍만하여 어여쁜 매화꽃. 초선을 닮아 보름달처럼 은은한 매화꽃, 서시를 닮아 지고지순한 매화꽃, 왕소군을 닮아 청초한 매화꽃, 여태후를 닮아 잔인한 매화꽃, 측천무후를 닮아 살기를 띈 매화꽃, 서태후를 닮아 모질은 매화꽃, 백설공주를 닮아 자는 듯 매화꽃, 작장중무(作掌中舞: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다) 조비연을 닮아 요염한 매화꽃, 초요갱을 닮아 색기(色氣)가 흐르는 매화꽃, 황진이를 닮아 자유분방한 매화꽃, 춘향이를 닮아 도도하면서도 절개가 있는 매화꽃, 심청을 닮아 연꽃처럼 피어나는 매화꽃, 기녀 매창을 닮아 서릿발 같은 매화꽃, 섹시 심벌 마랄린 먼로(Marilyn Monroe)를 닮은 매화꽃,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팜므파탈(Femme fatale)뱀프를 닮은 매화꽃, 마타하리(본명: Margaretha Geertruida Zelle, 여명의 눈동자)를 닮아 양다리를 건친 매화꽃, 클레오파트라를 닮아 콧대가 낮은 매화꽃, 마리 앙투아네트를 닮아 요정 같은 매화꽃을 비롯하여 촌부를 닮아 수수한 매화꽃, 구미호를 닮아 요사스러운 매화꽃, 새침데기로 돌아앉은 매화꽃, 나비와 꿀벌에 휩싸여 행복한 매화꽃, 찌그러진 매화꽃, 피다 만 매화꽃, 낙화를 시작한 매화꽃, 꽃, 꽃, 꽃, 이런저런 매화꽃들이 작은 우주를 이룬 듯 화폭 가득히 어우러져 자태를 뽐낸다.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원선 기자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원선 기자

다시 어깨를 털털 턴 뒤 밑바닥에서 찰랑거리는 술병의 모가지를 부여잡아 방바닥에서 질질 끌다가 번쩍 들어서는 고개를 뒤로 발랑 젖힌 뒤 입안에다 거꾸로 세워 흔든다. 속을 텅텅 개운 듯 뚝뚝 떨어지는 몇 방울을 끝으로 제 할 일을 마친 술병이 방구석으로 밀려나 떼굴떼굴 구르자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신다. 눈길은 다시 화폭으로 향한다. 부릅뜬 눈으로 한참이나 화폭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큰 붓을 들어 화폭을 향해서 힘차게 그어 내리다가 꺾어지는 싶더니 머리칼이 헝클어지듯이 휘어진다. 그제야 이리저리 흩어져 중구난방이던 매화꽃들이 제 집을 찾은 듯 아늑한 봄꿈 속으로 향한다.

그렇다고 마냥 봄꿈에 취해 있을 수는 없다. 동녘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다. 어둠이 토해 내는 봄날이 꿈결 같다. 각황전의 추녀가 가지련하게 모습을 보인다. ‘홍백매십정병’가 사람 앞에 모습을 보이 듯 화엄사의 흑매가 의연한 모습으로 새벽녘 소슬바람에 몸을 맡기고 섰다. 새들도 어둠을 빌어 곰처럼 웅크렸던 흑매가 불꽃이 일 듯 화사하게 피어나길 일구월심 기다렸나보다. 일찌감치 잠을 깬 직박구리, 곤줄박이, 박새, 등등이 날개를 펼친다. 새떼가 날자 명경지수의 아침 호수에 돌을 던진 듯 매향이 물씬 일어 가람이 오리무중이다.

무주공산에 들어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 역부여시(亦復如是: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홍백매십정병’이 내뿜는 매향에 취해 갈 길을 잃은 나그네는 각황전 앞에서 무념무상의 불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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