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5)-과실치사
녹슨 철모 (55)-과실치사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4.13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집에 가니 장난감 같은 아기가 누워 있었다. 그는 우선 손을 씻고 아기의 손발을 찾아 개수를 세어 보았다. 혹시 무슨 장애는 없는가 해서였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의사들이란 꼭 이런 버릇이 있다. 남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꼭 기승전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그런 습성 중의 하나다. 아기가 귀엽다, 반갑다는 느낌보다 먼저 어디 잘못된 곳은 없나 하고 보는 것도 병주가 보기엔 의사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태원의 강박적 사고로 보는 것 같아 썩 자연스럽게 받아지질 않았다. 아기의 팔다리를 다 살피고 나서 그제서야 “수고했어.” 라고 쑥스런 한마디를 하며 오랜만에 병주의 손을 잡았다. 병주의 볼에서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올 생각을 다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 2세가 태어났는데 왜 내가 안 와?"

   "난 당신이 하도 직업군인처럼 살길래 애와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죠.”

   "에이, 내가 군에 충성하는 것이 아이와 당신에 대한 최고의 애정 표시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 태원 자신도 그게 옳은 대답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항상 곁눈질하고 사는 자신의 위선을 그녀가 알고 하는 소린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기는 눈도 뜨지 않고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 어쩌다 한 번 눈을 떠서 잠깐 쳐다보는 흉내를 내는데 태원은 자신을 쳐다본다며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아기는 그 아버지의 얼굴을 그렇게 잠깐 보고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또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나 어쩌면 영천 삼사 올지 몰라.”

"3년 차 때는 서울 부근에 남아야 대학병원에 들어가기 쉽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영천까지 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로 전출해서 서울에 살면서 대학병원을 자주 드나들어야 정신과에 입국할 수 있다며 서울 쪽으로 갈 계획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의아하게 느꼈다. 태원은 한 번 마음 먹으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병주는 그의 말에 불길하다고 할까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삼사 교장 황 중장님은 당신도 알잖아. 베트남전의 영웅이라고, 그분이 나를 좋다고 하니 난 영광이지 뭐. 그리고 나중에라도 그런 분을 알아 두면 내 앞길에도 도움이 되고.”

이런 태원의 말을 들으니 병주는 더욱 이상한 느낌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학생 때 죽으나 사나 군부독재를 욕하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던 그가 그들의 덕을 보겠다는 논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여간 오랜만에 남편을 만났지만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는 장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부대에서 속히 오라는 연락이 왔다. 부대에서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그는 연락을 받자마자 급히 밤 기차로 고향을 떠났다. 학생 때 방학이면 타고 다니던 열차를 이제는 군인이 되어, 누군가의 남편이며 아버지가 되어 타고 떠나는 것이다. 밤을 새워 부대에 도착해 의무실에 가보니 사람이 하나 죽어 있었다. 군인아파트를 청소하는 민간인인데 그가 간질 발작을 하여 의무실로 데려와 응급처치를 하는 도중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의식을 잃고 토하는 사람을 옆으로 누이지 않고 바로 뉘어 토하게 뒀다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공호흡도 잘하지 못한 듯하였다. 사람 살리려다가 오히려 죽여 놓은 것이다. 태원을 급하게 부른 건 참모장이었지만 그 목적이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것이 아니고 사태를 부디 군단 고위층이 모르게 잘 무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죽은 사람의 가족이 조용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헌병대나 보안대가 가만히 있어 줘야 한다.

일단 민간인을 부대 안으로 데리고 온 것부터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의무실 선임하사와 위생병 그리고 숙소를 이탈하여 환자를 돌보지 않은 통신대대 군의관 등 줄줄이 문제가 되는 사안이었다. 이 사건으로 여러 사람이 다치게 생겼다. 노련한 군단 참모장과 참모들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먼저 태원은 죽은 사람의 집을 방문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갔다. 마침 죽은 청소부의 부인은 태원을 잘 아는 사람이라 오히려 반갑게 그를 맞아 주었다. 그는 먼저 죽은 청소부의 영정 앞에서 큰 절을 했다. 평소 자주 보던 사람이 죽었다고 하고 그 영정 앞에 절을 하고 있으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대체로 이런 사고의 경우 초상집에 가면 이상하게도 평소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던 사돈의 팔촌 같은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 와 문제가 커지는 법이다.

“군의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요?”

동네에서 철물점 하는 죽은 청소부의 친구가 술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묻기보다 시비조였다. 태원은 답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여보슈! 사람을 죽였으면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뇨? 대책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는 참고 또 참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고인은 부인도 아시다시피 저하고 무척 친했어요. 저분이 돌아가신 것이 저 역시 무척 가슴 아픕니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질 겁니다. 그런 잘잘못은 수사기관에 맡기십시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 봐야 서로 자신들의 입장만 주장하게 되고 결국은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태원은 전방에서 이성철과 마주하던 그 밤이 생각났다. 평소 장교들을 만나면 위세에 눌려 꼼짝도 못하던 기지촌 망나니들이 이 기회에 얼씨구나 하고 덤벼든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분이 차 올랐다. 분이 오르니 용기가 생겼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족들이다. 이 사람들이 떼를 쓰고 덤벼들면 문제가 커진다. 태원은 말하면서 고인의 부인을 쳐다보니 그녀는 전혀 표정이 없다. 태원은 자신이 생겼다. .

“나의 잘못이 밝혀지면 군법회의에 갑니다. 거기에서 잘못이 밝혀지면 사내답게 남한산성도 갈 겁니다. 그것이 고인이나 유족들도 원하시는 걸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진정해주세요.”

못 박아 얘기하니 모두들 조용하게 듣고만 있었다. 이 중에 한 사람이 나섰다.

“그래, 고인은 군의관님을 굉장히 좋아했어. 이제껏 보아온 군단 군의관 중에는 이런 분이 없었다며 자주 칭찬했지. 그래서 평소에도 민간인이면서 자주 의무실에 가서 치료도 받고 했잖아. 이번에도 그래서 병원 안 가고 사령부에 들어간 것 아니야? 다 운수소관이야. 그놈이 운이 다한 거야. 누가 누굴 죽인 건 아니야.”

조문객 중 인상 험악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여기저기에서 그 말도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원을 편든 사람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속셈은 그 일의 조리를 따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은 청소부의 자리를 자신이 이어받기 위해 태원에게 호감을 보인 것이었다.

 

“왜 자리를 비워 애들이 사고 치게 했어?"

헌병 대장은 단순명료한 사람이다. 미리 첩보를 받고 있었던 탓인지 내용도 묻지 않고 단 한마디 핀잔조로 얘기하고 끝내 버렸다. 보안대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었다. 하지만 태원은 헌병 수사과 직원들과 함께 보신탕집으로 가 대접을 하였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나서 대접이 소홀하다고 방석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태원은 돈이 없어 속이 좀 쓰렸지만 군인들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어 그들을 데리고 2차로 술집 순례를 했다. 헌병들은 자기가 신세를 지면 또 그만치 대접을 해주었다. 얼마 전에 중대장의 모친이 아파서 태원이 왕진까지 하며 진찰하고 투약해준 적이 있다. 돌아올 때 중대장 차로 오는데 뒷좌석에는 양주가 한 병 실려 있었다. 바깥 세상에서는 강자와 약자가 정해져 있어 강한 쪽이 약한 쪽을 항상 밟고 올라서지만 군에선 서로가 역할을 바꿔가며 발판이 되어 주니 결과적으로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풍습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아무 곳에서나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쪽에서도 어느 정도 권력이나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