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례 화엄사 홍매화에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홍백매십정병'을 그리다.
(1) 구례 화엄사 홍매화에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 '홍백매십정병'을 그리다.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04.07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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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 내에 2개의 대웅전이 있는 셈이다.
-“문수보살님이여 이 몸이 죽어 궁중에 태어나 장육전을 재건 할 수 있게 굽어 살피소서” 외친 뒤 뛰어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부터 그런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그간 무쇠처럼 단단하게 옥쥐었던 오른손을 봄을 맞아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활짝 펴지는 것 이었다.
여명 속의 화엄사 홍매화. 이원선 기자
여명 속의 화엄사 홍매화. 이원선 기자

삼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마음은 온통 한그루 매화나무에 쏠렸고, 흡사 상사병이라도 도진 듯 사지가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일 년을 기한으로 임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렇듯 곡진할까? 겨울이 추울수록 매화는 향이 짙다는데 금년은 유난히 따뜻해서 온전하게 향이나 피울까? 조바심으로 지낸 밤이 또 며칠인가?

화엄사는 사적 제505호(2009.12.21지정)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년, 백제 성왕 22년, 고구려 안원왕 14년)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7년(신라 문무왕 17)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이후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아 계파(桂波)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경내에는 국보 6점, 보물 23점 등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 이원선 기자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 이원선 기자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전을 정면으로 그 왼쪽으로 각황전이 있다. 한가람 내에 2개의 대웅전이 있는 셈이다. 이는 지리산 화엄사가 칠보산 장곡사와 함께 2개의 대웅전을 가진 몇 안 되는 사찰 중의 하나인 것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전소된 장육전(국보 제67호 화엄사 각황전)재건에는 특별한 전설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설화 같은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동짓날을 맞은 어느 법회에서다. 그때 큰스님은 벽암스님과 계파스님의 장육전 재건을 불법이 깃든 오묘한 진리로 설법하고 있었다. 그냥 듣기에도 신통방통하여 각종 매체를 통해 검색한 바에 따르면 그 내용들은 대동소이 거의가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한다면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열과 정성을 다한다면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떠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의 한자성어)의 교훈처럼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진리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화엄사를 중창한 이는 벽암스님이다. 장육전 재건을 앞두고 입적을 예상한 벽암스님은 장육전 중창을 위한 화주승을 선임하기에 이른다. 그 방법이 묘해서 화엄사 내의 모든 스님을 불러 모은 뒤 물 한 대야와 밀가루 한 부대를 놓은 후 물을 묻힌 손에 밀가루를 묻히는 것이다. 모든 스님의 손에 밀가루가 묻었지만 유독 계파스님만은 밀가루가 묻지 않았다. 이에 계파스님이 화주승으로 내정된다. 가진 것이라고는 가사와 장삼 한 벌, 발우,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들이 전부다. 막대한 재물이 소용되는 장육전의 재건 앞에 막막한 계파스님은 법당에서 불경만 욀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까무룩 잠이든 순간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은 계파스님이 바랑 하나를 달랑 울러 메고선 새벽길을 나섰다. 그날 새벽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붙잡고 장육전 중창을 간절히 부탁하는 계파스님이다. 비는 사람도 부탁을 받는 사람도 딱하기가 한량없고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사나흘 걸러 공양간서 얻은 누룽지로 연명을 하던 늙은 노파는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보니 답답하기가 한량없다. 고심 끝에 높은 절벽에 오른 노파가 하늘을 향해 합장을 하고선 “문수보살님이여 이 몸이 죽어 궁중에 태어나 장육전을 재건 할 수 있게 굽어 살피소서” 외친 뒤 뛰어내린다. 이 사건으로 계파스님은 살인자로 몰려 옥고를 치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궁중으로 흘러들게 된다.

당시 궁중에는 어린공주가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을 꽉 쥐고선 펴질 않는 것이다. 임금과 왕비, 후궁과 나인들이 나서서 어르고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질병이 아닌가 싶어 어의가 온갖 명약으로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공주가 계파스님을 만나자 복장 따위나 초면을 불구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긴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궁중으로 흘러든 계파스님의 복장을 말이 아니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 피골이 상접하여 꾀죄죄한 몰골이야 세월이 준 훈장이라 어쩔 수 없겠지만 산문을 나설 때의 무명옷은 거의 전부가 새로운 헝겊으로 물갈이다. 거기에 서툰 바느질이 훑어간 짜깁기 탓에 너덜너덜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코를 쥘 정도의 지독한 냄새는 덤으로 땟국까지 자르르 하다.

스님들의 이런 누더기 복장에도 지위고하가 있는 것으로 함부로 입을 수는 없다. 누빈 곳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계파스님의 경우 유리걸식으로 떠도는 중에 세월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 옷이다. 당시 계파스님은 내력도 모르게 입은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분이 상승이 된 것으로 십자가에 불가사의한 힘이 깃들어 있듯 스님이 입는 옷에도 나름대로 불력이 스며있었던 것이다.

화엄사의 홍매화의 화려한 자태. 이원선 기자
화엄사의 홍매화의 화려한 자태. 이원선 기자

일예로 10년간이나 상사뱀의 저주에 시달리던 원나라공주가 청평사에서 임했던 가사불사는 25장의 비단을 이어 붙여서 지을 승복이었다. 아마 큰스님의 것으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승복이다. 그런 까닭에 아무나,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신성한 옷이었던 것이다. 그 신성한 가사불사의 공덕에 불교의 불(佛)자도 모르는 원나라공주의 손길이 닿은 것은 여간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부터 그런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따지고 보면 원래 일이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아니면 부처님의 깊은 뜻이 서린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본다면 천방지축의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다가 오행산에 500년간 갇힌 뜻과 일맥상통한지도 모른다. 문제는 원나라공주가 그 시간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나는 길에 무심코 넘어다 본 방안에 널브러진 비단조각이 원나라공주의 눈에 고기비늘처럼 반짝거렸다는 것이다. 원나라공주는 호기심이 바짝 일어 굶주린 아이가 된 것이다. 굶주린 아이는 눈앞에는 놓인 음식에서 죄업을 가리지 못하는 법이다. 일단 먹고 보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안의 중대함을 알리가 없는 원나라공주가 좌우를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장난감을 다루듯 다루었고 곧장 바늘을 들었다. 난생 처음해보는 바느질이다. 어떻게 하는 줄도 몰랐다. 떠듬떠듬 두어 바늘 꿰맸을까? “어디서 빌어먹는 여자가 들어와 신성한 가사불사를 망쳐 논담”는 호통소리에 낮도깨비를 만난 듯 혼비백산 달아나지만 그 인연으로 인해 상사뱀의 악착같은 저주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하늘을 이불로 삼고 땅을 방바닥으로 누워 풀을 베개로 삼은지가 몇몇 해던가? 무심한 세월은 사찰을 떠나기 전 함께 기거하던 도반들도 몰라볼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당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지만 “스님”하는 소리에 심봉사가 눈을 뜨듯 눈앞이 환하였고 그때 눈에 비치는 것이 있었다. 비단옷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꼬마가 넘어질 듯 비틀거려 달린다. 금방이라도 엎어질 듯 위태로워 어~어 하는 사이 생면부지의 낯선 이에게 지체는 높고도 높아 금지옥엽인 공주가 덥석 안기더니 왜 이제야 왔냐는 듯 앙탈이다. 의복이나 냄새 따위를 초월한 공주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은 주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계파스님은 단칼에 목이 떨어질 지경이다. 주위의 위급한 분위가 어떻든 말건 아랑곳 안고 헤실헤실 웃던 공주가 그간 무쇠처럼 단단하게 옥쥐었던 오른손을 봄을 맞아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활짝 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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