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60주년] 홍수연 씨 "내가 겪은 4·19"
[4.19 60주년] 홍수연 씨 "내가 겪은 4·19"
  • 권오섭 기자
  • 승인 2020.04.17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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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
4.19혁명의 주역인 홍수연 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권오섭 기자

 

2·28대구학생시위에서 3·15마산시민항쟁으로, 4월 11일 1차 마산시위(3월 15일 부정선거), 4월 18일 고려대학교 3천여 명의 학생들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 낭독 후 국회의사당까지 진출, 4월 19일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 총궐기, 4월 25일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 선언문 채택, 학생과 시민들 시위에 동참, 4월 26일 대규모 군중들 정권의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 이승만 대통령직 하야.

1960년 4월 숨 가빴던 역사의 시간이었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누구보다 앞서 나가겠습니다. 그 당시는 오직 자유당과 대한청년단, 경찰이 한 통속이라 선거 시 1표라도 야당이 나오면 색출해 사돈이라도 경찰서에 잡아넣었어요.” 4·19 혁명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생생한 현장을 함께했던 홍수연(84·대구 북구 노원로) 씨를 만나 60년 만의 기억을 함께해본다.

‘당시는 산에 가서 나무 한 지게를 해오더라도 푸른 솔가지 하나라도 있으면 산림법 위반으로 잡혀가던 시대이고, 대한청년단 완장 하나 차면 법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어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법천지의 자유당 폭정에 나섰던 시대였습니다.“

4·19부상동지회 섭외부장을 지냈던 홍 씨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일명 한밤마을)에서 태어나 대구 성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주변의 도움으로 정한철 교수(서울대학교 섬유과)의 개인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상급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서울 경복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 야간부(당시 동대문운동장 맞은편 위치)를 거쳐 2년 후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고, 2학년 재학 중 4·19를 맞이하게 된다.

1960년 4월 19일 오전 홍 씨는 서울 종로에서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선 데모에 참여한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도 있었지만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은 부정부패에 항거했다. 종로에서 출발하여 당시 내무부 앞을 지나 종로로 오는 시위 행렬이었다. 내무부 앞을 지나는 순간 경찰의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차량에 탑승했던 시위대원이 쓰러졌고, 쓰러진 시위대원을 의료진이 병원으로 황급히 실어 나르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어둠이 내릴 때 쯤 잔인한 폭력과 진압으로 종로경찰서로 붙잡혀가게 되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폭력에 시달렸다. 홍 씨도 이때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고, 눈을 뜨니 백병원(중구 필동) 응급실에 있었다. 머리와 허리를 다쳐 25일간 입원(101호실)하였다.

“다친 사람을 짐짝 취급하며 병원 앞에 던져 놓고 가면 의료진이 나와 병원 안으로 데려가 치료를 했다”며, “당시를 회상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는 심정”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홍 씨는 다시 고향인 군위로 이송되었고, 대구 경북대병원 403호실, 407호실 등 입·퇴원을 거듭하며 약 8개월의 치료를 받았다. 70세까지도 두통과 허리 통증이 심하여 약을 복용하였으며 심할 때는 허리에 피를 빼면 그날의 고문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나마 통증이 덜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당시 치료비는 대한적십자사가 모든 것을 처리했고 자료도 그곳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국가보훈처 같은 기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치료를 받으면서도 4·19혁명부상동지회 회장 안병달(당시 동국대 재학·경북 영천 출신) 씨, 부회장 정재학(당시 동아대 재학·경북 의성 출신) 씨, 섭외부장 홍수연(당시 성균대 재학·경북 군위 출신) 씨 등으로 조직을 구성하여 부상자를 위해 앞장섰다. 이후 4·19부상동지회는 1961년 4·19동지회(이철승·이기택)로 이관되었다.

4·19부상동지회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남기기 위하여 미국 기자가 찍은 600여 장의 사진을 미국대사관을 통해 받아 ‘4·19혁명청사’(革命靑史) 제작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귀중한 자료를 당국에 압수당하고 혁명청사는 마무리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10권이 채 되지 않은 빛바랜 책자를 최근까지도 보관하고 있었으나, 자제분이 경희대학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419동지회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선일보 대구지사(대구 중구 향촌동 사옥 시절) 2층에 대구지부 사무실이 있어 초대 대구지부장의 직책을 맡기도 했으나 이후 지부도 없어지게 되었다. 홍 씨는 부상 치료 등으로 대학을 중퇴하였으며 중고등학교 시절 배운 섬유업을 중심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홍 씨는 “4·19에 참여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았던 시기라 등급을 받지 못해 올바른 평가나 보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적지 않다”며 “이들에 대하여 국가가 적극 나서 혜택을 주는 것이 다른 유공자들과도 형평이 맞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특히 정치권이나 기관단체에서 나서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시 등급을 받은 부상자들은 어느 정도 보상을 받고 있지만, 자신 같은 사람들은 주먹구구식으로 일시에 지급되는 위로금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홍 씨는 생계에 바빠 시기를 놓친 많은 부상자와 고인이 된 분들의 유가족들도 5·18 등 민주화를 이끈 타 유공자들처럼 올바른 평가를 해주는 것이 공평하다고 강조했다.

홍 씨는 20여 년 전 직접 나서 자료를 수집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자신의 치료기록은 찾을 수 있었으나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기록까지 받아낼 수는 없었다며, 하루 빨리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길 소망했다. 모든 부상치료 등이 대한적십자사에서 이루어졌기에 자료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그때의 상황이 오면 누구보다 앞장서 투쟁할 겁니다. 불의를 대하는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홍 씨는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열정만큼은 20대와 다름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생존해 있을 때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4·19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국가가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