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60주년] 60년 전 그날의 기억
[4.19 60주년] 60년 전 그날의 기억
  • 김길영 기자
  • 승인 2020.04.1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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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와 이들을 저지하려는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
시위대와 이들을 저지하려는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  4.19혁명 제40주년 기념사진전 도록

 

동급생들과 어깨를 겯고 광화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쯤이었다. 탱크 몇 대가 운집한 시민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시위대 일부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옆에 사람들이 일으켜 세우려 하자 그들에게도 기관총을 쏘아댔다.

나는 그 삼엄한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계엄이 선포된 줄도 몰랐고 경무대 앞까지 시위대가 진출하다 사망자가 무더기로 발생했다는 보도도 알지 못했다. 군중들 틈에 우르르 떠밀려 몸을 숨긴 곳이 동아일보 사옥 담벼락이었다. 머리띠를 두른 대학생들이 어깨에 서로 손을 얹고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를 외쳐대고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사리판단이 가능한 고등학생이었다면 고분고분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나는 광복 이후 12년째 자유민주주의를 배우는 중이었다. 세상은 내가 공부한 내용과 다르게 부조리의 바퀴를 단 수레가 삐거덕거리며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선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틀을 깨고자 하는 아들의 심정 그것이었다. 학생들을 길거리에 내몬 단초는 3.15부정선거였지만, 부정을 용인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사는 그 부정한 어른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젊은이 생각은 그 사회의 거울이기도 하다. 젊은 생각이 지속생동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다. 돈 봉투와 고무신, 설탕봉지와 밀가루 포대가 선거에서 표로 둔갑했다는 사실은 이미 병든 사회를 의미한다. 당시 우리 사회를 이끈 지도자들의 덕목이 그 정도였다면 백년대계를 위해 갈아엎어 마땅했다.

일제 강점기에 발생했던 광주학생사건, 선거 유세에도 참석 못하게 일요일에 등교시키려다 촉발된 대구 2.28학생 시위,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산의 3.15시위와 4.11시위는 학생들이 시민과 함께 분연히 일어선 사건들이었다. 4.19학생의거니 혁명이니 따질 일이 아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바뀐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춘궁기를 잊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뭔가 모르게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5푼쯤 되는 무리들이 성층권 검은 구름처럼 떠서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들이 우리 인간사회를 내려다보며 깔보고 비웃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