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㉔보약 한 제 먹느니 여행을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㉔보약 한 제 먹느니 여행을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4.03 09: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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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청년회 주관으로 단체여행 다니기 시작
여행이야기로 고된 농사일도 견뎌냈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3, 4월 못자리 하기 전이나 7, 8월 논매기 마친 후의 비교적 조용한 틈을 이용하여 여행을 다녔다. 처음에는 당일치기로 영남권 일원을 다니다가 차츰 1박2일로 강원도, 남해, 서울까지 가기도 했다. 교통편은 안강 읍내에 살고 있는 윤 씨를 통해서 경주의 관광버스를 대절했는데, 윤 씨는 명랑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마을사람들 간에는 ‘윤 까불이’로 통했다.

원래 여행하면 보통 여름에 포항으로 해수욕장 가고 ‘사방약수탕’ 또는 영천 ‘황수탕’으로 약물 먹으러 가는 정도였다. 포항역에 내려 송도해수욕장까지는 약 2km 거리로 죽도시장을 구경하면서 걸어도 30여 분이면 됐다. 사방약수탕은 안강 역에서 경주 방면 기차를 타고 사방역에 내려서 서쪽으로 40분 정도 걷는 거리에 있었다. 당시 포항역과 사방역은 지금 모두 폐역이 됐다.

1982년 4월 6일, 소평교회 청년회 주관으로 여행 중 경주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 둘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황봉룡 집사, 다섯 번째가 정응해 집사, 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는 새깨어른이다. 정재용 기자
1982년 4월 6일, 소평교회 청년회 주관으로 여행 중 경주박물관 앞에서 기념촬영. 둘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황봉룡 집사, 다섯 번째가 정응해 집사, 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는 새깨어른이다. 정재용 기자
1989년 5월 4일, 소평마을 청년회 주관 경로잔치로 경주보문단지 여행. 정재용 기자
1989년 5월 4일, 소평마을 청년회 주관 경로잔치로 경주보문단지 여행. 정재용 기자

그밖에 화수회(花樹會)로 옥산서원이나 포항에 가고 신라문화제 구경하러 경주 황성공원에 가는 사람이 있었다. 소평교회는 가끔 5월 첫째 주나 둘째 주일에 대여섯 교회가 연합예배에 참가했다. 강동 뒷산 혹은 낙산다리 밑 잔디밭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단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계기가 됐다.

1969년에 명명된 ‘새마을운동’은 농촌근대화의 ‘새마을사업’으로도 불렸다. 마을 담장을 흙에서 시멘트로 바꾸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개량하고, 마을 안길을 넓히는 사업이었다.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에 따라 마을 자체적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소평마을은 ‘청년회’를 조직하고 이 사업을 청년회가 추진하도록 했다. 청년회는 권태원, 김석봉, 김형곤, 김형태, 이종학, 정운수, 주영택, 주종길, 장정득, 최정술, 홍덕은, 황도원, 황병윤 씨가 주축이 됐다.

이들은 양동 갱빈으로 가서 모래를 실어다가 정부에서 주는 시멘트로 랭가(れんが 煉瓦, ‘벽돌’의 일본어)를 찍어내서 벽돌 담장을 쌓았다. 그리고 마을 안길을 넓히기 위해 덮개가 없던 배수로를 시멘트 수로로 만들고 덮개로 덮었다. 여기에서 번 돈으로 단체여행을 시작한 것이 단초가 됐다.

청년회는 새마을사업이 끝나고도 ‘탁다깨이(탈곡기)’를 사서 동네 타작을 해서 짚 볏가리까지 기금 모으기를 계속했다. ‘탁다깨이’는 탈곡기 원동기의 폭발음에서 따온 애칭이었다.

여행 갈 때면 청년회 외의 가정도 ‘풀이한(상당한)’ 값을 내고 참가했다. 보통 스무 가정의 부부로 보면 마흔 명으로 버스 한 대가 됐다.

소평마을은 행정구역상 안강읍 육통3리였다. 황새마을이 3반까지였고 소평마을은 4반과 5반이었는데, 교회에서 북부학교 가는 길로 갈라서 남서쪽은 4반, 북동쪽은 5반이었다. 정월대보름 줄다리기할 때처럼 여행 주선도 4반 반장 김형곤 씨와 5반 반장 김석봉 씨가 수고했다.

경주 일원은 가까운 거리라서 가기 좋아 여러 번 갔는데, 특히 1982년 4월 6일 소평교회 청년회 주관으로 ‘경주보문관광단지’ 갈 때는 손자를 업고, 어린이를 데리고, 연세가 많은 분도 함께 갔다. 보문관광단지는 1974년에 시작하여 1979년 4월 1단계 공사 후 개장했는데, 더러는 ‘보문단지’를 ‘보물단지’로 착각하기도 했다.

점차 여행 지역은 전국 곳곳으로 확대됐다. 부산 울산 양산과 통영 여수 등 남해 일원을 다니고, 감포 강구 영덕 울진 등 동해안 일대 그리고 문경, 단양 등 소백산맥의 내륙 명소를 관광했다. 청송 주왕산, 양산 통도사, 문경새재, 울진 성류굴, 단양 도담삼봉, 고수동굴 등 소평마을 사람들의 여행 이야기는 해마다 쌓여갔다. 여행 차림은 언제나 정장이었다.

궁궐 계단에 앉아 남자들끼리 한 컷, 둘째 줄 왼쪽 첫 번째가 김석봉 씨, 오른쪽 두 번째가 김형곤 씨다. 정재용 기자
궁궐 계단에 앉아 남자들끼리 한 컷, 둘째 줄 왼쪽 첫 번째가 김석봉 씨, 오른쪽 두 번째가 김형곤 씨다. 정재용 기자

가장 인상 깊은 여행은 1974년 봄의 3박4일 서울여행이었다. 서울여행은 비용도 많이 들거니와 집을 오래 비운다는 게 부담이 됐지만 불조심, 문 단속, 쇠죽 쑤기를 자녀들에게 맡기고 큰맘 먹고 나섰다.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기를 포함하여 모두 42명이었다. 숙소는 ‘동묘’ 근처의 ‘삼오여관’이었다. 날만 새면 버스를 타고 내리고, 걷고, 먹고, 사진 찍고 정신이 없었지만 웃고 떠들고 즐거웠다. 종일 걷고도 저녁 먹고는 ‘숭인풍물시장’과 청계천 구경에 나섰다.

남해 여행 중,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용복 씨다. 정재용 기자
남해 여행 중, 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용복 씨다. 정재용 기자

몇 년 후에는 금호댁의 김용복 씨가 소형버스를 사서 직접 운전했다. 마을사람은 잔치에 가거나 계중에서 놀러가기에 한결 수월했다. 소평교회서 소풍갈 때도 그 버스를 이용했다.

여행은 고된 농사일을 거뜬히 하게 하는 활력소였다. 허리가 끊어질듯 한 모내기를 하면서도 여행 이야기가 시작되면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두 세 사람만 모여도 내년 봄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여행 꿈에 부풀었다. 행복이 ‘큰거랑’ 맑은 물처럼 가슴마다 흘러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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