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남 구례 운조루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남 구례 운조루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04.0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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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영남 3대 길지 중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
한단지몽 같아 현상유지 조차 어려운가보다
“목련꽃이 부질없네요!” 속절없이 지는 꽃이 제 탓인 양 가만가만 읊조린다
운조루 전경. 이원선 기자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 전경. 이원선 기자

대구에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雲鳥樓: 구름 속에 숨은 새란 뜻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말하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고 한다.)까지는 승용차로 약 2시간 거리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인 운조루는 안동출신의 지방 관료(낙안부사를 역임)였던 류이주(1726~1797)가 99칸의 집을 지음으로써 그 역사가 시작된다.

특별히 운조루를 찾게 된 이유는 그간의 역사적 사료(史料)를 종합해 볼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산실이라는 확신에서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1808년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단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며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합쳐진 말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영남 3대 길지 중 하나로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라는 뜻)다.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 또는 하늘의 선녀가 잘못하여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한다.

동네에는 3개의 진혈(眞穴) 터가 있는데 그중 한 터를 금구몰니(金龜沒泥:금빛 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힌 형상을 지닌 터)라 했으며, 다섯 보물이 모여 있어 오보교취(五寶交聚)의 명당이라고도 불렀다. 운조루 창건 당시 집터를 조성 중에 돌거북이 출토되고 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은 운조루가 차지한 셈이 된 것이다.

동백꽃잎이 떨어진 정원. 이원선 기자
동백꽃잎이 떨어진 정원. 이원선 기자

명당에 집을 짓고 벼슬길에 나아가 금은보옥이 언덕을 이룬다 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일 수는 없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대구에서 이웃한 경주시 교동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문이 있어 경주 최부자 집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경주 최부자 집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300여 년간 명맥을 꿋꿋하게 유지하는 데는 몇 가지 기준을 세웠으며 이를 가훈으로 철저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라! 또한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백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며, 1년간 쌀 생산량이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가용으로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 운조루는 지리산 줄기가 흘러내리다가 원만하게 둔덕을 이룬 후 펑퍼짐하게 퍼져 내리는 산기슭에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행랑채는 동서로 일자형이고 안채는 ㅁ자형 구조다. 앞쪽은 들판으로 눈이 모자랄 지경으로 그냥 지나치면 그저 한적한 시골에 터를 잡아 앉은 평범한 와가로 느껴질 정도다.

삽짝거리에는 할머니 몇 분이 달래나 상추 등등 제철 나물과 지역 특산물을 박스나 보자기 위에 오밀조밀 펼쳐놓고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전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로 소박했다. 일행 중 한 분이 상추와 달래 등을 흥정하는 동안 안으로 들자 인당 천원의 입장료를 내란다. 비바람에 씻겨간 세월 속에 주름이 깊어지고 이빨이 빠져 삐거덕 기우는 고택, 흘러간 부귀영화가 한단지몽 같아 현상유지조차 어려운가 보다.

호흡을 깊게 하고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드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타인도 열게 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 라는 뜻)란 서툴지만 또렷하게 글자가 새겨진 뒤주(나무로 만든 곡식을 담는 궤)다. 경주 최부자 집의 가훈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준이라면 운조루는 이 뒤주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늠하는 잣대다. 당시 운조루의 재산 상태를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려운 이웃에 베풀고 아픔을 함께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타인능해란 글자가 또렷한 뒤주. 이원선 기자
타인능해란 글자가 또렷한 뒤주. 이원선 기자

예나 지금이나 흉년이 들면 생활고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때 운조루에서는 뒤주가 빌 새 없이 쌀을 채웠다. 배고프고 굶주린 주민은 귀천이나 이유를 막론하고 쌀을 가지고 갈수 있게 한 것이다. 부끄럽고 자존심이 강한 주민을 위해서 타인능해가 적힌 입구는 사람이 다니는 길 쪽으로, 쌀을 채우는 입구는 집안으로 두어 밖의 사정을 볼 수 없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쌀이 줄지 않았다면 부(여인네)덕이 부족한 탓으로 더욱 근신하기에 이른다.

굴뚝은 추녀와 평행이거나 축대보다 높게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이는 연기(煙氣:무엇이 불에 탈 때에 생겨나는 흐릿한 기체나 기운)가 많은 오염물질을 내포하고 있어 집안을 보호하려는 조치인 것이다. 따라서 쓰레기를 태우면 발암불질 다이옥신이 나오고, 연탄이 타면 일산화탄소가 나온다. 장작이나 솔가리, 죽은 삭정이 등을 태우기에 사정이 났다고는 하지만 맵고 아려 몸에 해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운조루의 거의 모든 굴뚝이 축대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부를 감추려는 배려지심으로 끼니를 걸러야 하는 이웃은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에도 서럽기 때문이다.

운조루가 있는 전남 구례는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을 아지트로 한 빨치산(6·25 전쟁 전후에 전라북도 순창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들의 악명이 높던 지역이다. 그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다. 식량을 약탈당했고 누옥은 불에 타서 재로 변했다. 장정들은 있는 수대로 끌려가 온갖 허드렛일과 노역에 시달린 끝에 죽어야만 피로 응어리진 삶이 끝나는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었던 시절 유독 운조루만은 멀쩡했다. 그간 베풀어 온 삶이 화를 비켜가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은 것처럼 조용한 와가의 뒤쪽으로는 대나무가 절개를 지켜 늘상 푸르고 앞쪽엔 지리산을 씻은 옥계수가 조잘조잘 이야기거리를 만든다. 덜컹거리는 솟을대문을 살짝 비켜서서 수문장처럼 우뚝한 산수유는 오는 손님을 반겨 노랗게 손을 흔든다. 대문간을 넘자 마당 가득 눈부시게 내려놓는 봄볕 속에 참새 부부가 자목련 꽃봉오리를 희롱하며 봄꿈에 젖는다. 동백꽃이 핏빛 정열을 토하다가 툭툭 떨어진 화단은 벌겋게 물들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렸다.

안채로 접어들자 서까래를 받치는 나무기둥은 세월의 두께를 더해 손때가 반질반질 묻어나고 동남쪽의 구석 자리에 터를 잡은 음전한 목련은 오종종한 장독들 위에서 흰나비라도 된 양 나붓나붓 날개를 뒤집는다.

가지런한 장독대 위로 목련이 지고 있다. 이원선 기자
가지런한 장독대 위로 목련이 지고 있다. 이원선 기자

봄볕이 가득한 마당 한 쪽에 쪼그려 앉아 병마다 간장을 저울질하던 주인장은 “목련꽃이 부질없네요!" 속절없이 지는 꽃이 제 탓인 양 가만가만 읊조린다. 타인능해의 본질을 대하는 듯하여 “봄이 다 그렇죠!” 더불어 숙연해진다. 여러 봄날 중에 진정 차분하고 따사로운 봄인가 싶다. 어머니의 젖을 문 아기로 돌아간 듯 아련하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듯 꿀벌의 날갯짓이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의 하모니로 귓전에서 감미롭다. 이마에 닿을 듯 낮은 추녀가 정겹고 사랑채로 통하는 쪽문을 헤집는 햇살이 자글자글하여 발걸음조차 조곤조곤하다.

솟을대문을 향하는데 문설주 아래선 과자 부스러기를 내어주시던 할머니를 만난 듯 흰머리에 구부러진 어깨가 연신 주억거린다. 들어올 때는 없었는데 언제 왔는지 운조루의 종부(宗婦:종가의 맏며느리를 가리키는 가족용어)가 오가는 길손을 맞아 난전을 펼쳤다. 콩, 팥, 간장, 표고버섯, 쑥 등등 봄 향을 빌어서 손님을 맞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새벽 참에 뜯은 듯 보이는 나물을 뒤적거려 검불을 집는 등 손질에 여념이 없다.

“텔레비전에서 뵀습니다” 하자 수줍은 듯 미소를 지으며 “예~ 나왔지요!” 잠시 손길을 멈추고 환한 웃음이다. 가슴 저 밑바닥까지 훈훈해지는 봄이다. 고향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버들피리 가락에 흥을 실어 생을 예찬하듯 나들이 한번 잘 왔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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