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자기통역과 이심전심
(53) 자기통역과 이심전심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03.23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기통역은 말의 정수기 필터(filter)이다.
pixabay
pixabay

 

개나리 피면 다시 온다던 봄이 진달래와 함께 꽃 대궐 이루었다. 그 반가운 만남이 이루어진 어제 오후, 산방(山房) 앞뜰 잔디에 크로버와 잡풀을 뽑았다.

크로버는 땅속줄기(地下莖)를 뻗어가며 마디마디에 뿌리를 내리며 영역을 넓혀가는 식물이다. 이 작업을 해보면, 크로버 땅속줄기가 잔디 사이로 거침없이 스며들며 번지는 특공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호미 끝으로 크로버 특공대를 파 올리면서 6∼7 센티 정도 되는 땅속줄기를 왼손으로 당겨가면서 제거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뿌리의 중심부, 즉 원뿌리를 찾아서 발본색원하는 것이다. 그 특공대 한 두 개만 없애면, 본부에서 다시 새 지하경을 내보는 식물이 크로버이다.

따스한 햇살, 푸른 하늘, 그리고 진달래꽃 개나리꽃 가지에 스치는 봄바람이 다정했다. 묵언수행 하듯 한참 동안 크로버를 뽑으며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읽은 ‘자기 통역’이란 말이 생각났다. 통역은 말하는 화자(話者), 통역자, 듣는 청자(聽者), 3자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언어활동이다. 그런데 자기통역이라니, 생소하다. 

자기통역은 혼자서 <화자-통역자-청자>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을 내가 통역하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때는 내가 무슨 말을 했지? 하면서 스스로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하는 말을 내가 제대로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무의미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통역은 내가 하는 말을 정제(整齊)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자기 자신의 말을 가지런하게 간추리는 일’이 자기통역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020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하는 과정에 통역을 담당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최성재(Sharon Choi)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장했다. “미국인이 되기에는 너무 한국적이고, 한국인이라기엔 너무 미국적인, 그렇다고 한국계 미국인도 아닌” 존재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그녀는 “통역사가 직업이었던 적은 없지만, 지난 20년간 나 자신의 통역사로 살아왔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중앙일보. 2020.2.19.)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지난 20년간 나 자신의 통역사로 살아왔다”는 고백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을 ‘자기 통역’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정체성의 혼란을 ‘자기 통역’으로 극복했다는 뜻이다. 상황에 따라 한국인처럼 느껴지는 나를 미국인으로 통역하고, 미국인처럼 다가오는 나를 한국인으로 통역하는 자기 극복의 수련이 ‘자기 통역’이었다. 20대 젊은이에게 보기 드문 정신세계임에 틀림없다.

평범한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늘 자기통역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무슨 말을 하고 나면, 상대방이 ‘무슨 소리냐? 다시 한 번 말해봐!’ 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혹은 마음에 없는 말을 쉽게 하고 나서, ‘아차!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 라고 뉘우치지만 이미 늦은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자기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이다. 말을 함부로 했으니 그렇다.

‘자기 통역’은 먼저 말의 뜻을 바르게 간추리는 정신활동이다. 말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 가장 명확한 말을 가다듬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통역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 의하면, 통역은 ‘두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통역은 이심전심을 형성하는 일이다.’ 즉 말을 통해서 마음을 전하려고 다시 생각하면 간추려보는 과정이 자기통역이다.”

자기통역은 음식을 접대할 때처럼, 말의 내용을 확인하면서 온도를 조절하는 자기 배려의 마음공부이기도 하다. 같은 말이라는 ‘말의 온도’에 따라서 대화 상황이 달라진다. 음식이 따뜻해야 하듯 말에도 따뜻한 인격의 온기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통역은 수신(修身), 즉 마음을 갈고닦는 삶의 과정이다. 오늘 내가 한 말이 내일의 나를 만들게 된다.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으로 살게 하고,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삶의 씨앗이 된다. 자기통역은 말의 정수기 필터(filte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