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2)-한미 1군단
녹슨 철모 (52)-한미 1군단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3.2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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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안주인도 없는 태원의 집에 총각 소위들이 또 모였다. 군단에서 의정부 한미1군단에 파견 근무하고 있는 이 소위도 모처럼 왔다. 11군단은 한국국군 중 유일하게 미군의 지휘를 받는 부대여서 영어 잘하는 이 소위가 연락장교로 가 있다. 그는 학군단 출신으로 매일 태원의 집에 오던 그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얼마 전 그쪽으로 파견을 나가게 되어 밤 모임에 뜸했다. 또 한 사람은 새로운 부군단장의 부관이 되었다. 한미1군단은 미군 부대여서 일행은 모두들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한국군은 군단장이 전방에 가서 귀대하지 않으면 전 장병이 퇴근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나저제나 그의 헬기가 돌아오는가 해서였다. 그쪽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양놈들은 말이야, 우리와 너무 다르더군. 우리 막사는 밤에 방에 커튼을 치고 모든 불을 끄게 하잖아? 그런데 걔들은 거꾸로야. 밤이면 더욱 불을 밝게 하지. 그래야 적들이 올 때 더 잘 싸울 수 있다는 거지. 퇴근 때도 군단장이 전방에 가서 오지 않아도 다들 제 갈 길로 가는 거야. 대신 군단장 영접조는 철저하게 기다렸다가 헬기가 내리면 죽도록 뛰어가 경례를 붙이며 영접하더라고. 그들을 보면 혼동 속에 철저한 질서가 엄연히 존재해.”

"야! 그따위 소리 때려치우고 재미있는 얘기 좀 해봐! 그래 백마는 한 번 타봤어?" 

일동이 물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직 타보지 못했어.” 

그러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걔네들은 장교들이 초청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영내에 들어올 수가 있고 또 들어오면 식당이나 술집에 데리고 가 대접도 할 수 있어. 퇴근 무렵 근무교대 때는 양갈보들도 영내에 많이 들어오지. 규정이 이러니 지네들 남녀 군인들이야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지. 난 아직 영어도 서툴고 또 성병도 겁이 나 백마 탈 기회가 있어도 조심을 해.”

"그럼 매주 수요일 ‘훌렁 쇼’ 가 있다는 얘긴 진짠가?"

"아, 그럼. 나체쇼는 우리나라 여자가 와서 하는 거야. 그곳에는 장교 클럽과 하사관 클럽이 따로 있는데 재미는 하사관 클럽이 훨씬 낫다는군. 하지만 장교들은 그곳으로 갈 수가 없어.”

“그럼 김 소위가 차를 내고 다음 수요일에 우리를 초대해. 저녁도 먹고 쇼도 한번 보자.”

“김 소위는 통신대 근무할 때보다 부관 생활이 더 나은 거야?" 

이제 화제의 주인공은 부군단장 부관으로 자리를 옮긴 김 소위로 바뀌었다.

"이번 부군단장은 옷 벗으러 온 거냐?"

“아마 그런 것 같아. 육사 8기인데 아직도 별이 하나거든. 그것도 자기는 감지덕지하고 있지. 어느 날 청와대에 육사 8기들의 모임이 있었대, 대부분 준장이었는데 김 준장은 당시 대령으로 그곳에 갔다더군. 육 여사가 평소에 안면이 있어 ‘아니! 김 대령은 아직 장군이 못 되셨어요?’ 이 말 한마디에 그다음 날부터 그는 별 하나를 달게 되었다는군. 하지만 이제 옷을 벗어야지. 사람은 참 좋은데 능력이 모자라는 것 같아. 이제 동기들은 소장이 되었잖아. 사람이 순하고 착하니 난 참 편하고 좋지 뭐.”

“언제 B관사(부군단장 관사)에서 한 번 모이자고. 상납받은 양주가 많거든. 웬만해선 없어져도 그 어른은 챙기지 않는 성격이거든.”

"그러면 순서를 이렇게 정하자! 부 올빼미 관사는 언제나 갈 수 있는 거니까. 일단 한미1군단 나체쇼부터 보고 다음에 B관사로 가자고."

일동은 박수를 치며 이 계획에 모두 동의했다. 태원은 전방에서 미군들을 자주 접해봤으나 그들 대부분이 속한 데는 말단의 조그마한 부대였다. 미군의 큰 부대에도 한번 가보고 싶던 참에 그도 박수를 크게 쳤다.

 

선영은 그의 동창인 이춘 소위를 만나고 있었다. 선영이 근무하는 야전병원은 야트막한 산 속에 위치해서 나름대로 야생화와 나무들이 어울려 무성한 곳이다. 선영의 친구 이춘은 N.O.Q(독신간호장교 숙소)에 살고 있었다. 선영은 결혼 후 이곳을 떠나 지금은 병원 부근 시골집 월세방에 살고 있었다. 선영은 이춘과 같은 육군간호학교를 다녔고 임관 후에 첫 발령지인 이 병원에도 같이 전입해왔다. 선영과 이춘은 탈의실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영이 너! 요즘 좀 이상해 보여.”

“......”

“좀 멍하게 보인다고나 할까? 뭐 그렇게 느껴지네.”

“안 그래도 너와 이야기가 좀 하고 싶었어.”

선영과 이춘은 어느덧 병원을 벗어나 숲길을 걷고 있었다. 둘이 자주 다니던 길이었건만 이날 선영은 마치 낯선 곳으로 처음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너도 곧 결혼할 거지?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말이야.”

"당연하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결혼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지만 하고 후회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왜 느닷없이 결혼 타령이야?"

"춘아! 결혼 전에 난 얼마나 자유롭게 살았니? 누군가를 사귀는 것도, 여행하는 것도, 먹는 것도, 노는 것도... 하지만 결혼하는 순간 모든 것이 남편에게 맞추어지더라고. 처음에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런 변화가 용서되었지. 둘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재미가 덜해지고 나중에는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해지기까지 하는 거야. 하지만 요즘 내가 이렇게 멍청해진 건 그런 권태증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그것 말고 또 무슨 일이 있니?" 

이춘은 강한 호기심을 보이면서 빠르게 질문하였다.

“나, 그동안 계속해서 군단 의무실장을 만나고 있었어. 전에 너랑 만난 뒤 난 결심했어, 그 사람과 헤어지기로.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만 한때는 차라리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결혼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 그러나 난 현실을 택하기로 했던 거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날 만나자고 했을 때 만나주었어. 그 사람을 만나면 내 마음이 편해졌거든. 꼭 너처럼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이야. 때론 애인 같기도 하지.”

이춘의 표정에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남자 문제로 흔들리는 선영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결혼 전 선영은 매사에 분명하였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한때 선영을 미친 듯이 짝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모 사단 치과 군의관이었는데 매일 선영에게 편지와 선물 공세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그가 선영을 만나자고 밤새 비를 맞으며 문밖에 서 있었지만 선영은 매정스럽게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선영의 마음을 결국 얻지 못했다. 그렇게 단호한 성격의 선영이 이미 결혼한 남자와 계속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네 감정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유부남이고 너는 유부녀가 아니니? 네가 계속 그런 감정을 가지고 그를 만난다면 결국 그것은 불륜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답답하다는 거지.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니까. 결혼했다고 해서 사람의 감정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헤어지면 보고 싶고 집에서나 병원에서나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니까 멍한 상태가 돼 버린 거야.”

선영은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이춘의 불륜이라는 말에 가슴이 더욱 답답해짐을 느꼈다.

"의무실장의 생각은 뭐니?"

“태원씨도 나와 같이 대책 없이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오히려 나보다 더 이성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이춘 역시 특별히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복잡하지만 너무 급하게 해결하려고 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감정들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 

선영은 멍하니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말했다.

“난...단순히 사랑하는 감정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현실을 망각했던 거야. 만약에 너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자주 만난다면 넌 아무렇지도 않겠니? 나라면 미칠 것 같아. 헤어지고 싶었을 거야. 죽이고 싶었을 거야.”

"그렇겠지. 네가 이런 일로 힘들어할 줄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넌 항상 이성적이고 현실적이었잖아? 그러던 네가 갑자기 왜 이렇게 감정적인 사람으로 변했니?"

마른 몸매에 짧은 단발의 선영은 강인하고 날카로워 보였지만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나도 변한 나 자신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 처음엔 꼭 운명적 만남처럼 만나지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지. 하지만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를 가져야 한다는 소유욕과 남편을 속여야 한다는 현실 때문에 너무도 힘이 들었어.”

"사랑은 운명이야. 넌 잊지 않았겠지. 비 오는 날 병원 앞에서 널 만나겠다고 밤새도록 서 있던 그 치과 군의관. 끝까지 넌 결국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잖아.” 

이런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의 긴장은 어느 정도 풀어지면서 웃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