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환의 ‘꽃씨처럼’
배창환의 ‘꽃씨처럼’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03.18 08:4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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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의 ‘꽃씨처럼’

 

날 때부터 누구나 홀로 와선
제 그림자 거두어 저물어 가는 것
 
빛나던 날의 향기도, 쓰라린 고통의 순간들도
오직 한 알 씨앗으로 여물어 남는 것
 
바람 크게 맞고
비에 더 얼크러지고
햇볕에 더 깊이 익어
 
너는 지금 내 손바닥에 고여 있고
나는 또 누군가의 손바닥 안에서
생의 젖은 날개 파닥파닥 말리며
꼭꼭 여물어, 까맣게 남는 것
 
 

시집 '별들의 고향을 다녀오다' 실천문학. 2019. 09. 30

 

길을 가다가 꽃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마치 전생에 꽃이었던 듯 격하게 반기며 찍는다. 이름 모르는 꽃 앞에서는 핸드폰을 열고 이름 찾기 검색을 통해 기어이 알아낸다. 잘 여문 씨앗엔 카메라 대신 손이 간다. 지난가을, 산책길을 오가며 딴 꽃씨가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껍질에 싸인 까만 열매가 눈길을 끌었다. 여름 내내 예쁜 색으로 피고 지던 나팔꽃 씨앗이었다. 심어줄 땅 한 뼘 없으면서 몇 꼬투리를 땄다. 애써 쥐고 와놓고 쓰레기통에 버리기가 미안하여 천리향 화분에 얹어두었다. 겨우내 잊고 지냈는데 지금 저 홀로 싹을 틔웠다. 심장 모양의 떡잎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다. 다시 시작이란 듯이.

‘날 때부터 누구나 홀로 와선/제 그림자 거두어 저물어 가는 것’ 도입부에서부터 여운이 묵직하다. 아직 다 겪지 않은 나의 인생을 그려보느라 쉽사리 다음 행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오직 한 알 씨앗으로 여물어 남’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것이 꽃만이겠는가. 우리도 다를 바가 없다. ‘바람 크게 맞고/비에 더 얼크러지고/햇볕에 더 깊이 익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타인의 눈에는 쉬워 보이고 하찮아 보여도 어느 생인들 그리 호락호락한 삶이 있을까. 까맣게 익은 한 알의 작은 꽃씨도 수많은 땡볕을 끌어안고 별빛을 벗 삼으면서 바람을 견디고 벼락을 피하여 살아남은 결정체다. 말라서 보이지 않는 눈물은 또 그 얼마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