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역사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의 역사
  • 김종기 기자
  • 승인 2020.03.09 12:2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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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길흉은 언제나 함께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변화가 절실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막막할 때 이런 생각을 한다. 내 팔자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안 풀리지? 사주풀이나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사주풀이를 하는 사람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때 찾게 되는 사주명리학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흔히들 사주팔자라고 부르는 명리학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당나라 이허중(李虛中)과 송나라 서자평(徐子平)이 만든 것이라 한다.

당나라의 이허중은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에서 인간의 운명은 태어난 년, 월, 일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면서 태어난 년을 기준으로 사주팔자를 분석했다. 오늘날까지도 당사주(唐四柱)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

명리학이라는 용어는 엄밀히 말하면 자평명리학(子平明理學)이다. 이 말은 송나라때 서자평이 쓴 연해자평(淵海子平)이란 책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자평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 주는 것은 년, 월, 일에 태어난 시까지 넣어 네 기둥, 즉 사주(四柱)을 만들었고, 태어난 일을 기준으로 사주팔자를 분석했다.

이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책사인 유백온(劉伯溫)이 사주명리학의 3대 고전중 하나인 『적천수(適天髓)』를 집필하면서 이론적 체계를 열었다.

이어 만민영(萬民英)은 이들의 주장과 예전의 흩어지고 잊혀졌던 책들을 집대성하여 사주명리학의 백과사전 같은 『삼명통회(三命通會』라는 책을 엮었다.

청나라 때는 작자 미상의 난강망(欄江網)이라는 책을 여춘태(余春台)가 『궁통보감(窮通寶鑑)』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였고, 심효첨(沈孝瞻)은 자평진전(子平眞詮)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오행이법 체계를 완성하였다. 적천수, 궁통보감, 자평진전은 사주명리학의 3대 고전으로 불린다.

이후 중국공산당 정권이 들어오면서 문화대혁명 때 현존하는 명리, 점술, 문예, 사상들을 멸종시켜 버렸다. 중국의 명리학자들은 대만으로 피신하여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후 아베 다이장(阿部泰山)이 아부태산(阿部泰山) 학파를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베 다이장은 중일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사주팔자에 대한 중국고서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다. 중일전쟁 후 일본으로 가져간 문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지금 일본의 사주명리학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때 가져간 문헌의 양이 트럭 1대 분에 해당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운명을 추리한다’하여 추명학(推命學)이라 한다.

우리나라에 사주명리학이 전파된 것은 늦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문화 전파 작용으로 당시 지식인들에 의해 유입·활용된 것으로 추된다. 그러나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태종 원년인 1401년 조선왕조실록이다. 명리학은 조선초기부터 과거시험에 명과학(命課學)이라는 과학(科學) 잡과(雜科) 및 취재(取才) 과목으로 편입되어 관용지학(官用之學)으로서 활용되며 국가와 왕실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명리학은 조선초기부터 제도권 내의 학문이었다. 현재처럼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명리학자들은 일제강점기를 든다. 일본의 한민족 정체성 말살과 민족정기 억압정책으로 인해 다른 학문들과 함께 지하로 숨어들면서 명맥이 단절되었다고 주장한다. 명리학을 단순히 점술행위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의 이치, 우주의 원리, 음양오행의 생극제화(生剋除禍)로 이루어진 학문인 명리학이 미신 취급을 받으면서 제도권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은 수 천년 전부터 자기운명과 미래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궁금해 할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영원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있는 것이고 운명은 우리가 매일 매일 내리는 작은 결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명리학은 음양오행의 수시 변화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을 파악하려는 길흉을 다루는 운명론이다. 사주팔자 자체만을 보고 좋고 나쁨을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에게 길흉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는 ‘화(禍)여! 복(福)이 기대고 있는 곳이로다’, ‘복(福)이여! 화(禍)가 엎드려 있는 곳이로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