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0)-장군 식당
녹슨 철모 (50)-장군 식당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3.1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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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직을 기다리던 부군단장이 삼사관학교 교장으로 전출간다고 했다. 태원은 이 소식을 듣고 시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섭섭하였다. 생각의 방향이 서로 다른 걸 부군단장은 대충 눈치를 채었으면서도 그의 카리스마와 독재자적 기질을 억누르고 태원에게 잘 대해 주었다. 태원은 서로 다른 생각과 다른 길을 가면서도 결국 한 사나이는 전쟁에 목숨을 걸고 싸우며 애국하였고 또 한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기에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목표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신기해 하면서 또한 기뻐하던 터였다. 아무튼 이별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군단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멸공! 부르셨습니까?"

"응. 거기 좀 앉아.” 

부군단장은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번에 삼사관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어. 그래서 당신을 나의 필수요원으로 선발하려고 해.”

삼사관학교 교장은 중장 자리였다. 소장인 부군단장은 임시로 대기 중이던 자리에서 승진하면서 이제 정식으로 보직을 받아서 떠나게 된 것이다. 3성 장군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측근을 데리고 전근할 수가 있는데, 이 사람들을 ‘필수요원’이라고 불렀다. 대개는 운전병, 부관 정도가 필수요원이 된다. 군의관이 필수요원으로 가는 법은 거의 없었다. 군의관은 보병들이 좋아하지 않는 병과였고 또 단기 장교였으므로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그 소리를 듣자 태원의 가슴은 잠깐 동안 기쁨에 울렁거렸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얼굴 찌푸린 적도 가끔 있었건만 그가 나를 인정해주었군' 하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당장 “네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가 원한다면 어디든 갈 용의가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준다면 북파공작원이라도 따라갈 자신이 있다는 마음을 평소에 지녔던 태원이 아닌가. 그러나 머리 속에는 문득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를 따라가면 직업군인되어야 한다. 물론 복부기간만 채우고 나오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굳이 얼마 남지 않는 기간에 영천까지 갈 이유도 없다. 길게 이야기는 못했어도 이 길이 직업군인이 되는 길로 생각이 되었다. 군사정권 서슬이 시퍼런 이 때  이런 줄이라면 너도 나도 줄서기를 자청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대학병원이나 대형종합병원에서 수련을 더 받고 전문의가 되고 싶었던 태원의 계획이 무너진다. 선영이도 떠올랐다. 영천으로 가 버리면 선영과는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태원은 평소 그답지 않게 대답을 못하고 앉아 있었다.

머뭇거리는 태원을 보고, 

"아, 그래. 내가 갑자기 얘기해서 그런데 내가 먼저 영천으로 가도 한 달 내 연락해주면 돼.”

그가 생각할 말미를 주었다. 태원은 부군단장실을 나오며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입신출세와 여자 때문에 이렇듯 호의를 무시해 버리다니 왜 이럴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선영의 곁은 떠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선영씨, 이번에 삼사관학교로 자리를 옮길 마음 없어?" 

태원이 물었다.

혼자서 끝낼 고민이 아니었다. 시간을 맞추어 강다방에서 태원이 선영을 불러낸 것이다.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선영의 눈이 둥그래져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우리 부군단장이 영천 삼사관학교 교장으로 가는데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이참에 선영씨도 나와 함께 그쪽 의무실로 옮기자고."

"왜 내가 태원 씨와 그쪽에 가야 돼죠?" 

선영이 이렇게 대꾸하자 태원은 기분이 상했다. 나름대로 마음이 교감되는 상태라고 믿고 있었던 그로서는 그녀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 말을 못하니 다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왜 후방에 가면 선영씨도 삼교대도 하지 않고 편해지잖아?" 

태원은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였다.

"하긴 그렇게 말하니 그렇기도 하네. 갑자기 말하니까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볼 게요.” 

그녀가 겨우 아슬아슬하게 태원의 부아를 가라앉혔다.

"그럼 가는 걸로 알고 부군단장님께 보고할 게.” 

그는 그녀가 딴 소리를 할까봐 얼른 자리를 떴다.

태원은 그의 아파트에 돌아와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은 있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좋아한다는 정도로는 함께 근무처를 옮길 수 있는 사이는 아닌 것일까? 혼자만 그녀를 좋아한 것일까? 아니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한 적도 있는데 말이다. 그건 나의 일방적 선언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배우자가 있는 남녀가 외간 남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죄악일까? 아무튼 태원은 선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대답을 하니 부군단장에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하여간 심정도 착잡하고 머리도 복잡하였다. 

부군단장은 확답을 듣지 못한 채 삼사관학교로 갔다. 태원도 조금 더 생각하기로 하고 시간을 미루고 있었다. 기다리던 어느 날 선영으로부터 영천으로 가겠다는 전화 연락이 왔다. 선영이 전화로 연락한 것은 태원의 성격이 급한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육군 중장이 대답을 기다린다고 하였으니 급하게 대답해준 것이었다. 태원의 가슴은 환희로 벅차올랐다. 같이 가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자신의 결정을 수용한다는 것, 즉 사랑하고 있다는 징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단의 일상은 매일 비슷비슷하지만 결코 같은 일이 반복되는 법은 없었다. 그날도 본부대 회의는 있었고 내용도 비슷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참모장인 박 준장까지 합석하였다. 참모장은 예하부대에는 관여를 하지 않고 주된 업무는 군단 사령부 내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것이다. 실제 허드렛일은 본부대장이 다 하지만 그를 지휘하는 것은 참모장이다. 그래서 가끔은 본부대 회의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야, 장교식당 취사병 불러와.”

어느날 본부대 회의에 느닷없이 나타나 취사병을 불렀다.

“취사병, 삼선짬뽕의 삼선은 뭐야?" 

그 사병은 무슨 장군이 이런 질문을 다 하는가 하고 뜨악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을 했다.

“네. 오징어, 새우 그리고 해삼입니다.”

“인마, 그걸 알면서도 장교식당 삼선짬뽕에는 왜 안 넣는 거냐?"

"누가 재료를 사줘야 넣지요.”  

녀석이 눈치 없이 대답하며 보급관을 흘끗 보았다. 참모장은 말을 바꾸었다.

"그럼 파 길이는 몇 센티로 자르는 거야?"

"대충 3센티쯤 됩니다.”

"앞으로 그 길이를 그대로 계속하도록 해. 그리고 설렁탕이나 곰탕에는 무엇이 중요해?" 

시험 치르듯 또 묻는다.

"그야 일단 좋은 고기를 써야 하고요. 다음에는 깍두기 맛입니다.”

취사병은 나가고 본부대 참모들만 앉아서 회의를 계속했다. 참모장은 계속 음식 이야기를 했다. 의무참모인 태원도 할 말이 많았다. 옴 환자 예방과 치료 그리고 유행성출혈열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고 그 일정을 의논하여야 했다. 하지만 음식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우리 장님들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일반 장교들과는 다른 장군식당을 따로 쓰시고 있잖소? 내가 그 어른들 모시고 식사 때마다 민망해 죽을 지경이야. 우선 식탁의 비품이 그게 뭐요? 병들 식당의 그것과 똑같다니 말이 돼? 간장 병, 고춧가루 병, 후춧가루 병까지는 좋은데 병 모양이 촌스럽고 낡아서 내가 볼 낯이 없어. 그러니 본부대장은 내일 조선호텔 양식당부터 한 번 가봐, 그곳에 있는 것과 똑같은 걸 사오도록 하시오." 

태원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들깻잎과 호박잎 찜을 좋아하는 군단장이 그런 호텔식 집기들을 과연 좋아할까? 저 사람이 정말 군단장을 잘 모시는 행동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깍두기 이야긴데, 그건 너무 시어도 안 되고 또 그렇다고 너무 날것도 안 좋은 거요. 그러니까 장님들이 항상 일정한 맛의 깍두기를 드실 수 있게 항아리를 몇 개 더 준비해서 시차를 두고 깍두기를 담그도록” 

정말 웃음이 났다. 별 단 장군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존엄성이 사라졌다. 대신에 인간적인 친근감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태원이 전방에서 별을 만나면 길 가다가 서서 “멸공”을 외치며 경례를 하는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같이 식단을 의논하고 앉았노라니 대위인 자신도 별 하나쯤 된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한 가지만 더 하고 갈게. 부대 내에서는 자동차가 시속 20km로 다니게 되어 있는데 왜들 과속하는 거야?" 

느닷없이 그 문제로 짜증을 내었다.

“네, 사령부 소속 차들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전방 예하부대에서 온 차들이 규정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시정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본부대장이 겨우 그를 달래 내보내었다. 철조망에서 북괴군들과 총을 겨누고 있는 전투병들이 있는가 하면 그 뒤에서는 이렇듯 깍두기까지 챙겨주는 장군들이 있어 군대는 조화를 이루고 또한 그 조직을 유지해 나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