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섭의 '주주총회(酒主總會)'
조이섭의 '주주총회(酒主總會)'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04.22 07:5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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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섭의 '주주총회(酒主總會)'

 

오늘은 주주총회가 있는 날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마시는 모든 술에는 주세가 붙어 있다. 그 세금을 낸 사람은 모두 주주酒主가 된다.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제 돈 내고 술을 사서 마셔본 사람은 모두 참석할 권리가 있다는 말씀이다.

오늘 참석한 주주는 술 한잔으로 고단한 오늘을 털어내고 내일을 기약할 용기를 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주총에 참석해서 딱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걸판지게 열릴 뒤풀이에 입맛을 다시면서 회의장을 기웃거린다. 일반 회사의 주주총회는 주식을 많이 가진 사람을 장땡으로 치지만, 여기서는 술이 좋아 술독을 끼고 사는 사람이나 술 앞에서 임전무퇴를 자랑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술이라면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경향 각지에서 모여든다.

주총의 좌석 배치는 당党에 따라 한다. 당은 술 마시는 유형과 술 마신 뒤에 행태, 즉 주정酒酊을 부리는 모양새에 따라 분류하고 인증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 끼리끼리 모인 당원들은 저마다 비표를 확인해 가면서 앉는데 그 당이라는 것이 대략 다음과 같다.

술은 여자와 마셔야 한다면서 색싯집 아니면 술 안 마시는 당, 술자리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는 일 없이 주구장창 안주만 먹는 당, 일체의 안주를 거부하고 강소주에 소금만 털어 넣는 당, 몸 생각한다면서 막걸리만 마시는 당, 저 혼자 잘난 척하며 남들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떠들어 대다가 잠시 쉴 참에는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는 당, 한마디 할 때마다 옆 사람 옆구리를 찌르거나 팔을 당겨 저만 쳐다보라고 히죽대는 당이다.

그뿐이 아니다. 주흥이 돋을라치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당이 있는가 하면, 2차 3차를 고집하는 당도 있다. 술만 취하면 아무 데나 엎어져 자는 당, 집에 들어가서 마누라를 쥐 잡듯이 잡는 당, 신세 한탄하며 훌쩍이는 당, 치고받고 싸우는 당,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했던 말 또 하는 당, 교육이건 정치건 모르는 것 하나 없이 목청을 드높이는 당, 술이 낫게 들어가면 개똥같은 시 나부랭이를 읊어대는 당도 있다. 참, 작년 주총 때 특별히 주주로 인정해 준 당도 있다. 술은 입에도 안 대면서 술값을 대신 내주는 분과 끝까지 술자리를 지키다가 노래방까지 따라가서 신나게 놀아주고, 집까지 운전해서 바래다주는 착한 분들이 모인 당이다.

지역에 따라 패거리를 지어 마시는 당도 있다. 경찰 지구대 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 끼리 모여 마시는 당이 있는가 하면, 앞산 밑 동네 사는 사람끼리 모여 마신다는 앞산당도 있다. 바로 내가 속해있는 당이다. 앞산 밑이라는 것이 말이 그렇지, 좌우 십 여리는 모두 앞산 밑이니 도시에 사는 내남없이 다 해당이 되니까 문제다. 강가로 이사 간 놈도 탈퇴가 안 된다는 넉넉한 조항이 있는 이상한 당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간에 깃발을 꽂아 두고 술판을 한 번이라도 더 벌려보려는 수작이다.

당이야 어디 소속이건 불문하고 당원들은 술 취한 눈으로 보이는 세상과 맨정신으로 보는 세상 두 가지 부류의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의 한 면만 보며 살다 가는 비주류非酒類인 사람을 불쌍하게 여긴다. 비주류들이 제 돈 들여 제 몸 망치는 주주를 가엾게 보는 가당찮은 눈초리는 세금 낸 자의 오만함으로 꿋꿋하게 버틸 줄 알아야 진정한 주주라고 주장한다.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이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밤낮없는 (雨雨雪雪風風, 晝晝夜夜) 음주로 유명한 수주 변영로의 명정 40년 행적과 연암 박지원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동탁 조지훈의 주도유단설酒道有段說 정도는 마땅히 숙지하고 있어야 주도酒道를 아는 문인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선배 풍류 주선酒仙들이 요즘 세상을 본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나, 혼자 술 마시기가 유행하고 있다. 혼술에도 단계가 있다는 데 어느 인터넷 거사居士가 잘 정리해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혼술하는 사람들을 당党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안건이 올라와 있고 회의 자료로 떡하니 배포되어 있기에 소개해 본다.

초급 1단계 : TV 보면서,

초급 2단계 : 컴퓨터 하면서.

중급 1단계 : 영화관에서 남모르게,

중급 2단계 : 공원 벤치나 놀이터에서,

고급 1단계 : 걸어 다니며, (일명 ‘길빵’이라고도 함)

고급 2단계 : 동네 구멍가게에서 혼자 술 마시는 경지

주총에서 처리해야 할 안건이 또 하나 있다. 요즘 있는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저지르는 성적인 추행이나 폭행, 갑질을 고발 고소하는 미투(Me Too)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사건 하나하나의 진실 여부나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거기에 왜 술이 약방 감초처럼 끼어 들어가느냐 말이다. ‘술자리에서 그 정도는 괜찮지 않으냐.’, ‘술자리여서 기억이 없다.’는 주장을 해서 맑은 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불량주주들의 자격을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는 내용이다.

잘못은 저희가 저지르고 맑디맑은 술에다 죄를 뒤집어씌우는 정신 빠진 주주 때문에 오히려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술병 뒤에 숨어서 지저분한 본능을 감추려는 사람들 때문에 술을 사랑하다 저지른 작은 실수를 애교로 보아주던 미풍양속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나만 해도 그렇다. 5층짜리 건물을 두 줄로 10동씩 나란히 지은 시영아파트에 살 때였다. 모양과 크기가 똑같은 건물이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내가 들어갈 구멍을 제대로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출입구를 제대로 찾았다 한들 층수를 틀리지 않아야 하는 관문이 버티고 있어서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번은 출입문에 붙어 있는 팻말이 깔축없는 402호인지라, 호기롭게 초인종을 눌렀다. 출입문이 빼곰 열리고 낯선 여자가 나오더니 “아저씨, 또 오셨군요!” 하며 생긋이 웃었다. 술 취한 눈으로 건물을 세다 보니 동棟을 잘못 짚은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자주 눌렀기에 ‘또 오셨군요.’ 라고 했을까. 요즘 같으면, 욕바가지를 원도 없이 덮어쓰거나 파출소에 끌려갈 터이다.

드디어 총회가 열리고 안건이 상정되었다. 첫 번째 안건인 혼술하는 당은 중급 1단계부터 당원으로 인증하기로 만장일치 통과가 되었다. 그러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술 마시고 성적 추행이나 성폭행을 하여 엄중한 술자리를 어지럽히는 주주의 처리는 다소 진통이 있었다. 이말 저말이 난분분한 끝에 술자리에서 추행이나 폭행을 하는 사람은 주주 자격을 박탈하기로 했다. 다만, 남녀 주주가 상호 합의로 하는 러브샷 정도는 눈감아 주기로 하였다. 행여나 다른 말이 나올까 싶어서 ‘상호 합의’라는 글자에는 밑줄을 긋고 붉은색으로 굵게 표기해 두었다.

이날 모인 남녀 주주들은 불의와 결탁한 술을 마시거나, 엄정한 주도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이며, 오로지 맑은 술에 걸맞은 맑은 주세 酒稅로 보국保國할 것을 다짐하고 만세삼창을 끝으로 주총을 끝낸 후에 질탕한 뒤풀이에 들어갔다.

 

수필집 "나미비아의 풍뎅이" 수필세계사. 2019.10.25.

 

200자 원고지 19매 분량의 좀 긴 작품이다. 주주株主와 주주酒主, 동음어를 언어유희로 풀어나간다. 작가의 위트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게 술술 읽힌다.

한때 나도 주식회사가 몇 개 있었다. 오너로서 주세를 너무 많이 납부하다 부도를 냈다. 지난해 문인들 몇이서 새롭게 하나 창립했다. 사명이 ‘양조김’이다. 주주총회는 주로 ‘새우장인’에서 연다. 새우의 장인과 장모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나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피차간에 인격 존중은 기본, 출자는 자율에 맡긴다. 대차대조표나 손익분기점을 따지지 않는 것이 무언의 회칙이다. 배당금은 힐링으로 지급받는데 즉석에서 각자가 눈치껏 챙기면 된다. 우리 조합원은 주세로 보국하며 나라사랑에 이바지하는 애국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