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게 시작한 기자 1년 후
서럽게 시작한 기자 1년 후
  • 박영자 기자
  • 승인 2020.02.27 04:15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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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시니어매일 기자가 되어 처음 보는 내 명함을 받아들고 보고 또 보면서  좋아했던  햇병아리적 생각이 난다.
2기 후배기자들을 맞이하면서 새삼스럽게 건방져 보이는 내가 보여  깜짝 놀랐다. 첫 기사를 썼을 때 몇 번이나 다시 고치고 사진 찍고 해서 승인을 얻어낸 기억이 엊그제인데...
구청 명예기자와 적십자봉사원기자 한 경력으로 자신만만하게 도전한 내가 부끄러웠다. 대충 대충  원고 써서 보내면 그곳에서 다 알아서 해주던 엉터리 기자였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못해서 친구나 아들이 기사를 보내니 자존심도 상했다. 짜증내는 아들과 힘들었다는 친구 말을 듣고  '그래 두고봐라 나는 할 거야'라며 다짐을 했다.
나름대로 잘 했다고 생각하며 동료들 밴드에 올렸다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는 망신과 질책을 받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급한 맘에 원고를 들고 홍 단장님께 가서 보여드리면 '다시 한 번 해 보이소' 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컴퓨터 앞에 앉혀 놓고 '자판 한 번 두드려 보이소' 할 때 독수리 타법으로 더듬거리니, "박 기자님 이거 못 하면 기자 못 합니다. 처음부터 확실히 자리 익히고 바로 하셔야지요" 한다. 타자수로 직장생활을 했던 내가 칠십 넘어 하는 일이 부끄러울 정도로 못하는 게 많았다.
'그래, 이왕 기자 하는 거 잘 해보자'라며 당장 노트북부터 샀다. 새벽이면 일어나 가나다라마바사를 눌러댔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독수리다. 한번 독수리는 영원한 독수리다.
스마트폰 만지기에 익숙해서인지 컴퓨터는 정말 못하겠다. 기사도 올릴 줄 모른다. 급하면 신문사에 달려간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체면도 없어지고 뻔뻔해진다. 무슨 배짱으로 기자를 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기자가 되자는 나의 각오가 있었기에 열심히 뛰고 있다.
글쓰기는 중앙도서관에서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배우려고 등록을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개강이 연기된 상태다. 기사를  쓰고 글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제는 동영상에서 인터뷰도 하고 직접 내레이션도 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동영상 공부를 2년째 하고 있고, 한 100편 이상은 만들어본 것 같다. 덕분에 스마트폰2급지도사 자격증도 따서 연봉 700만 원짜리 일자리도 얻었다. 요즘은 노노케어 시대라 노인이 노인을 같은 눈높이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배워가야한다. 복지관과 경로당 노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노인 일자리다. 
부푼 꿈을 안고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날을 기다리며 교재도 보고 스터디도 하고 있다. 기자로서의 생활은 제2의 인생을 또 다른 박영자로서의 삶을 살게 했다.
선배 기자님들의 배려에 2019년도에 '올해의 기자상'도 받았다.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그리고 겸손하겠습니다.
늦은 나이에 이렇게 신나게 살 수 있고 내 안의 끼를 맘껏 끄집어 내서  열심히 할 수 있고 일이있다는 것이 너무 즐겁다. 가던 길을 멈추고 더 가까이 와서 돌아보니 아름다운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에 치매전문가 과정이 끝나면 2개의 자격증을 딴다. 늦깎이로 공부한 사회복지사에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도전을 했다. 혹시 내가 치매가 와서 아무 기억도 못할까봐  시간 되면  공부하고 운동도 한다.
희망을 가불해서  남아있는 날들을 보람있게 채우면서 다 경험하고 살려 한다. 먼 훗날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2모작은 실패가 아닌  축복일 것이다.
따스한 봄이 온다.
이 좋은 봄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