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버려진 양심
거리에 버려진 양심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0.03.01 08: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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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숨을 죽여 웅크리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감염증 확산 사태로 공공장소와 시설 등이 폐쇄되고, 젊음으로 북적대던 시내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 어쩌다 볼일이 있어 외출을 하게 된 사람들도 빨리 달아나려는 듯 종종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러던 중 한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 옷깃이 요란하게 휘날릴 때,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구르는 것들이 보인다. 바람에 날리다가 전봇대에 부딪혀 멈칫거리다가 다시 가로수를 들이받으며 방향감각을 잃고 어지러이 한 바퀴를 더 구른 뒤, 잠잠해지는 바람과 함께 간신히 움직이기를 멈춘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행인들의 발길에 채이거나 밟혀 구겨지기도 한다.

가볍게 날리던 움직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누군가 버리고 간 종이컵이다. 그 컵에 주인은 없지만, 버리고 간 사람의 지문과 양심은 고스란히 묻어있을 것이다. 필요할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가 필요가 없어지니 함부로 버리고 간 사람의 양심은 어떤 모양일지, 뒹구는 종이컵처럼 바람에 날리다가 부딪혀 헤매다가 발길에 채이다가 저렇게 형편없이 짓밟혀 구겨지지는 않을지. 혹시 그 주인공이 저런 광경을 상상이라도 해본다면, 어떤 기분이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올 겨울은 유난히 푸근한 날씨와 미세먼지가 번갈아 찾아와 제대로 계절을 만끽하지 못했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따뜻한 겨울’이라는 보도도 있었을 정도로 지구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3월에 피어야 할 홍매화는 물론 매화, 산수유 등이 2월 중순에 서둘러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더불어 5월 초순부터 더위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에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경제적 풍요로 인류는 차츰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또한 그만큼 참을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후가 변하는 것은 기상학적 요인과 지리적 또는 환경적 요인 등의 상관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구온난화의 원인도 사람이며, 미세먼지 역시 사람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장이나 발전소의 가동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거리에 넘쳐나는 자동차와 냉난방기 가동으로 인한 열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날이 갈수록 경쟁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점점 높아지는 건축물은 햇빛을 가리고 바람을 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도심의 온실효과를 부채질하고 있다. 따라서 먼지는 널리 확산되지 못해 제자리를 맴돌거나 가라앉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공기 중으로 날리거나 우리의 인체에 스며들어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니,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지구의 문제와 환경오염에 책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원과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지구온난화의 원인자이며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이라는 표어가 있다. 버려지는 종이컵이나 빈병, 음료수 캔, 플라스틱 용기 하나도 재활용되거나 재사용되어야 할 자원이다.

거리에 버려진 양심에는 비단 종이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로수 그늘 아래 소복소복 쌓이는 담배꽁초, 버스정류장에 슬며시 놓고 가는 커피 용기와 과자 봉지. 곳곳에 분리수거함이 비치되고 친절한 안내문이 붙여져 있건만, 공원 벤치에도 빈 술병이나 음료수 캔, 종이컵과 생수병 등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집 주변에 누군가 몰래 종이컵이나 마시다 남은 음료수 등을 버리고 간다면, 그 맛이 개운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곳이 자신의 집 정원이라면 아무렇게나 담배꽁초를 버릴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가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무언가가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루듯,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작은 정성이 모여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는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거리에서 또는 공원에서 갈 곳을 잃어 방황하거나 짓밟혀 구겨지는 버려진 양심의 주인공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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