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㉒지문을 비문에 대자 소는 혀를 내밀어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㉒지문을 비문에 대자 소는 혀를 내밀어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2.26 15:1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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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빈은 소평마을의 목장
소털 같이 많은 날도 꿈결같이 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소를 몰고 갱빈(강변)으로 갔다. 갱빈에는 농약 안 묻은 풀이 있어 소 먹이기 좋고 소풀(소꼴) 하기도 좋았다. 그리고 소 먹이러 온 아이들이 많아서 함께 놀기도 그만이었다. 1964년 6월 20일(토요일) 어느 소년의 일기가 재밌다. “풀을 한 망태 해 놓고 소를 먹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가 내 어깨에 두 발을 들어 올렸다. 나는 얼른 피했으나 ‘밀사리’를 해 먹느라 한 곳에 모여 있던 동무들은 피할 새도 없었다. 광조는 어깨와 목을 다치고, 수덕이는 손가락과 이마를 다치고, 진토는 다리를 다쳤다” 일기는 매일 소 먹이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축산일기’ 같았다. 소년의 집은 송아지를 얻기 위해서 늘 암소를 길렀는데 암소가 발정을 내면 가끔 그런 일을 벌였다. 발정 내는 것을 ‘암새 내다’라고 했다.

발정을 내면 황소를 불러다가 교미를 시켰다. 이것을 ‘홀레(흘레) 붙이다’라고 했다. 새벽에 황소 주인이 소를 몰고 오면, 황소는 암소가 외양간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암소 뒤로 가서 냄새를 맡고, 웃는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던 소가 웃는다”는 이런 광경을 두고 한 말일 터였다.

난데없는 ‘19금(禁) 쇼’에 마당이 떠들썩하자 아침상 준비하러 장독간으로 나왔던 앞집 새댁은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다가 황급히 사라지고 옆집 밀양댁 할머니는 마루에 걸터앉아 구경을 했다. 교미는 금방 끝났다. 밤새 울어대던 암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고 황소는 느긋한 황소걸음으로 되돌아갔다. 홀레 붙이는 대가는 콩 한 말이었다.

소평마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소 먹이는 데 이력이 났다. 초가집 사이로 희미하게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소 먹이는 데 이력이 났다. 초가집 사이로 희미하게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소를 이끌고 나가 풀 뜯기는 것을 소 먹인다라고 했다. 아이들이 매일 소 먹이러 가는 데는 갱빈이었다. 방천 둑에 소를 풀어 놓으면 소들은 풀을 뜯다가 콩 한 말과 상관없이 홀레를 붙고 아이들은 모여 노느라 그런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

비학산, 어래산 골짜기를 타고 쏟아지는 큰물 때문에 기계천변(갱빈)은 폭이 넓었다. 그러나 우기가 끝나면 물은 모래밭 가운데로만 얕게 흐르고 방천 둑에서 실개천 쪽으로 퇴적토가 쌓인 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밭을 일궈 먹었다. 밭에서 실개천까지 이르는 중간에 잔디밭, 자갈밭, 모래밭이 차례로 펼쳐져서 풀 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고기를 잡으러 어디로 갈까나노래 부르기 좋았다. 자갈과 굵은 모래가 섞인 데는 여뀌가 지천이었다. 여뀌는 고마리 비슷하게 생겼으나 마디는 굵고 붉은빛을 띠었다. 여뀌는 맵고 독성이 강해서 소도 먹일 수 없고 베어 말려서 땔감으로 밖에 쓰지 못했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여뀌를 따불때이라고 불렀다.

농촌에서 소 없이 농사짓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특히 쟁기로 논을 갈거나 써레로 무논을 썰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가 있어야 했다. 소가 없는 집은 품앗이로 일을 해주고 소를 빌렸다. 토지가 없어서 소작인데다 소까지 빌려야 하는 농부의 등골은 서러웠다. 1967년 9월 29일 (금요일) 안강 장날 우시장에서 송아지 딸린 어미 소의 값은 5만원, 수송아지는 2천300원이었다. 수탉 270원, 암캉아지 630원, 미꾸라지 한 사발에 130원 하던 시절에 소 값은 거금이었다.

가난한 농부는 장리(長利)로 살아갔다. 보리나 쌀을 꾸어 와서 이듬 해 1.5배로 갚는 장리를 소평마을 사람들은 장래 먹는다라고 했다. 보리는 보리로 쌀은 쌀로 갚았다. 장리에서 장리로 연명해 가는 농부가 자신의 소를 가지는 것은 꿈에도 소원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배내기(배내)’였다. 부자가 암송아지를 사서 농부에게 주면 농부는 그 송아지가 자라나서 새끼 낳을 때까지 먹이고, 송아지를 낳으면 어미 소는 부자에게 돌려주고 송아지는 자신이 가지는 제도였다. 그 기간은 보통 두 해 정도였다. 가난한 농부로서는 가급적 풀이 귀한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어미 소를 돌려주고 싶어 했다.

농작물이 그렇듯이 소도 사람이 거두기에 따라 다르게 자랐다. 없던 소가 생기면 온 가족이 좋아서 밤잠을 못 이뤘다. 안고 쓰다듬고 눈을 뜨자마자 외양간으로 달려갔다. 소는 뿔과 뿔 사이를 손으로 긁어주면 좋아했다. 긁는 중에도 더 긁어 달라고 머리를 들이 밀었다. 겨울이면 저녁마다 누울 바닥에 짚을 깔아 주고 소삼정(소덕석)을 쳐 줬다. 그리고 날이 새면 거름더미 옆에 쳐 놓은 말뚝에 이까리()’를 매고, 삼정을 벗긴 후, 대나무 비로 등을 쓸어 줬다.

밤새 어둠 속에 외양간에 갇혀 있던 송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마루운동 하듯 마당을 뛰어 다녔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라기의 글 그대로였다. 농부의 아들은 외양간으로 들어가서 소똥을 수금포()로 싸리나무 소쿠리이 담아 거름더미에 부었다.

왼쪽에 거름더미 오른쪽에 짚 볏가리가 보인다. 정재용 기자
왼쪽에 거름더미 오른쪽에 짚 볏가리가 보인다. 정재용 기자

보통 아침 소죽은 아버지가 쑤고 저녁 죽은 아들이 끓였다. 소죽은 여물 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작두에 짚을 잘게 써는 일이었다. 다음은 건초를 썰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말려 둔 것이었다. 물은 쌀뜨물이거나 설거지하고 나온 구정물을 썼다. 물이 끓으면 여물, 건초를 넣고 그 위에 보리 탄 것이나 쌀 등겨 혹은 콩깍지를 두어 잘바가지를 끼얹었다. 정미소에 가서 보리 대충 빻는 일을 보리 탄다라고 하고, 나무로 깎아서 만든 손잡이까지 딸린 바가지잘바가지라고 했다. 나무 잘바가지는 나중에 함석 바가지로 바뀌었다. ‘소두뱅이(솥뚜껑)’를 들썩거리며 김이 나면 도중에 소죽 갈고리(기역자 나무 갈퀴)’로 소죽을 한번 뒤집었다.

겨울 새벽이면 방구들이 식기 마련이어서 아무리 아랫목으로 파고들어도 허탕이었다. 솜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자던 농부의 아들은 어렴풋이 방이 뜨뜻해 지는 것을 느끼며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소죽을 끓이시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소죽은 아침저녁으로 끓였고 점심은 식은 죽을 주거나 데워서 줬다. 뜨끈뜨끈한 소죽을 구유에 붓고 그 위에 찬물을 반 물통 끼얹어 식혀주면 소는 북적북적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잘 먹인 집의 소는 엉덩이에 쇠똥 하나 묻어 있지 않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농부의 자랑이었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소마다 비문(鼻紋, nose print, 소의 코 앞 맨살로 된 부분에 있는 무늬)도 다르다고 한다. 어쩌면 조물주는 만물 하나하나를 유일무이한(unique) 존재로 지었을지 모른다. 소는 소죽을 먹다 말고 감사를 표하듯 'QR(Quick Response, 빠른 응답)코드찍힌 코를 들어 소년의 손등을 핥아 주고 소년은 그러는 소의 콧등을 긁어 주었다. 그해 소의 이름은 누렁이였다. ‘소털 같이 많은 날이 꿈결같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