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에이지 골든 라이프] '4전 5기 영원한 챔피언’ 홍수환
[골든 에이지 골든 라이프] '4전 5기 영원한 챔피언’ 홍수환
  • 이용근 기자
  • 승인 2020.02.24 17:3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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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환의 매력? 눈이 살아있는 사람
내 삶은 도전. 도전 빼면 뭐 있어
일흔 한살 나이는 잊고 살지, 항상 미친듯, 시간을 쪼개듯
권투 후유증 없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
근황은? 후배 양성, 강연 등 사회와 소통하며 바쁘게

 

홍수환 회장이 여전히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멋진 권투자세를 취해 주었다. 촬영: 김보석 사진작가
홍수환 회장이 여전히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멋진 권투자세를 취해 주었다. 촬영: 김보석 사진작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국민들의 얼굴이 마스크로 가려진 날, 지난 2월 6일(목), 16:00 서울역 4층에 위치한 대구경북기업인라운지에서 “4전 5기 영원한 챔피언” 홍수환(71) 선수를 만났다. 라운지가 있는 4층으로 가는 길,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그의 뒷모습은 70대 노인의 흔적보다 신기하게도 호기심 많은 청년의 풋풋함이 묻어 있다. 라운지를 들어서자 그를 알아보는 낯선 시선이 분주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마치 링 위에 올라가는 선수 마냥 가볍다. 책상 하나 달랑 놓여있는 좁은 공간에서도 쉐도우 복싱(shadow boxing) 포즈를 취해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신나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그러나 저 눈빛을 보라. 50전 41승(14KO승) 5패 4무, 그가 링에서 만났던 50명의 상대 선수들이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는 저 눈빛에 이미 한풀 꺾였는지도 모른다. 오후 6시, 라운지가 닫히자 세종문화회관 근처 그의 오랜 단골 빈대떡집을 찾아 막걸리 한 잔과 잔치국수로 이어진 두 시간을 더해 4시간여 동안 “권투와 도전정신”을 떠나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열정적인 삶을 스케치했다.

-회장님 반갑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물을 뵈니 외람되지만 참 “젊고 활기차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실례지만 회장님 연세가 올해 어떻게 되는지요?

▶1950년생이니 일흔 한살인가요. 사실 나이를 잊고 삽니다.

-첫인상이 '참 스마트하다'라고 느껴지는데요, 자신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날카로운 눈, 눈이 살아있는 사람이랄까요, 선수시절부터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눈이 처지면 선수 생활도 힘들 뿐만 아니라 눈이 바로 박혀야 사회를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 그렇군요. 평소 건강을 위해 특별히 하는 운동이나 음식, 흔히들 이야기하는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난 항상 미쳐서 살아요, 그런 걸 많은 사람들이 물어봐요. 그때마다 난 “시간을 짤라가면서 산다” 이렇게 말씀드려요. 운동 뭐 이런 것보다 바쁘게 사니까 건강한지도 몰라요. 할 일 없이 처져 있으면 건강할 수가 없지. 이런 생활이 오늘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권투라는 것이 서로 때리고 맞고 하는 운동인데, 젊은 시절 권투선수로 활동했던 영향으로 요즘 생활하시는데 불편하거나 후유증 같은 것은 없는지요? 두통이나 뭐 그런 ...

▶ 전혀 없어요. 참 다행스럽지요. 이런 점에서 하느님께 늘 감사해요.

- 한국권투위원회(KBC, Korean Boxing Commission) 회장님이라는 공식적인 일정 외에도 강연 등으로 참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떻습니까?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바쁘게 살고 가급적이면 친구들 만나는 것은 피해요. 후배 선수들 시합을 주선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또 재미있는 일도 생기고 또 좋은 사람들이 초청해 주시고 그렇게 사회와 소통하며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파나마, 멕시코에서 40년전 라이벌 선수들과의 만남

- 로베르토 듀란, 헥토르 카라스키야, 알폰소 자모라 등

고인이 되신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과도 인연

사람과의 인연 중시, 아버지 유산, 사람이 재산이다

내 삶은 도전. 도전 빼면 뭐 있어

 

- 지난해 말인가요, 중남미를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요, 특별한 이슈가 있었는지요?

▶ 중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분을 알고 있는데 저랑 띠동갑으로 12살 어린 분이지요. 이 분이 저희 부부를 초청해 주셔서 12일간 일정으로 파나마와 멕시코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거기서 무려 43년 만에 4체급을 석권한 전설적인 복서, 돌주먹 로베르토 듀란(Roberto Duran, 파나마, 전 라이트급, 웰터급, 라이트 미들급, 미들급 세계챔피언, 103승 79KO 16패)을 만났어요.

 

듀란과의 반가운 만남    홍수환 회장 제공
듀란과의 반가운 만남     홍수환 회장 제공

- 그 분과 연배는 비슷한가요?

▶ 나보다 한 살인가 어려요. 내가 50년생, 그 친구가 51년이니까.

- 그런데 이분과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요?

▶ 1977년, 4전 5기 신화를 썼던 카라스키야와의 경기에서 이기고 난 뒤에, 이 친구가 축하해 주기 위해 호텔로 나를 찾아온 거예요, 이 세계적인 복서가. 그날 밤에 혼자 와서 악수만 하고 헤어진 거야. 요즘처럼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이잖아. 소중한 만남인데 사진이나 뭐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많이 아쉬웠지. 그 후 43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소.

- 호텔로 홍 회장님을 축하해주러 찾아왔다구요?

▶ 당시 듀란 선수가 자신의 아내랑 자국 선수인 카라스키야를 응원하기 위해 챔피언 결정전 시합을 보러 왔는데 내가 2라운드에 4번이나 다운을 당하니 '아, 이 경기 끝났구나' 하고 일어나서 경기장을 나갈려구 하는데, 뭐가 시끄러워 뒤돌아보니 경기가 역전되고 오히려 내가 이겨버린 거야. 4번 다운된 선수가 다음 라운드에 오히려 KO시킨 경기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를 축하해주려고 일부러 호텔로 찾아온 거야. 고맙지.

- 그런데, 이번에 어떻게 만날 수 있었나요? 미리 약속을 하고 갔던가요? 아니면 현지인이 도움을 주신 건지요?

▶ 아니, 그냥 들이댄 거야. 파나마에 가면 듀란 거리가 있어요. 그 거리에 듀란 동상도 있고 구글에 찾아보니“로베르토 듀란 레스토랑”이 있더라구. 그래서 식당하는 줄 알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런데 식당을 하는 게 아니고 듀란이 살고 있는 집이더라구. 벨을 누르니 누가 왔냐고 물어요. 한국에서 홍수환이가 왔다고 하니 옷을 좀 갈아입고 나갈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그렇게 만났지.

- 참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용기가...

▶ 내 삶이 도전이잖아. 도전 빼면 뭐 있어. 그 날 이후 이번에 처음 만난 거지. 참 만나고 싶었어요. 카라스키야는 한국에서도 보고 했는데 듀란은 그 이후 한 번도 못 만났으니까.

- 홍 회장님을 기억하던가요?

▶ 기억하더라구. 만나니 그 양반도 그렇게 좋아하더군. 사실 듀란도 상대한 선수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다 기억할까 했어요. 게다가 세월이 이미 43년이나 흘렀는데 “나는 모른다, 나중에 미리 약속하고 와라"라고 했으면 못 만났을 텐데 말이요.

- 카라스키야도 사전에 약속한 게 아니었나 봐요? 이 분을 통했으며 좀 더 쉽게 만났을 텐데 말입니다.

▶ 약속 안했어요. 듀란을 만나고 파나마 운하를 보러 갔지. 1977년 시합하러 갔을 때 운하를 보긴 했었는데 체중조절 등 시합에 신경이 쓰여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 느긋하게 보고 돌아오다가, “아니 여기까지 와서 카라스키야를 안 만나고 가면 되겠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한국에 왔을 때 통역해 주던 분에게 바로 카톡을 날렸지. 진짜 카톡 좋더구만. 그 분에게 바로 연락이 왔어 카라스키야 아내분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는 거야. 그렇게 연락이 되어 부인이 우리가 묵고 있는 메리어트 호텔로 와서 우리를 데리고 카라스키야가 시장(市長)으로 있는 산 미겔리또(San Miguelito)에 가서 만났지. 난리났지, 홍수환이 왔다고.

 

자모라와 함께    홍수환 회장 제공
자모라와 함께. 여전히 권투 지도자로 후배를 양성 중이다.    홍수환 회장 제공

- 홍 선수를 두 번이나 이긴 알폰손 자모라는 어떻게 지내시던가요?

▶ 알폰소 자모라(alfonso zamora, 멕시코, 1954년생, 33승 32KO승 5패)는 멕시코 아마추어 복싱 권투위원회 지도자로 있나봐요. 멕시코시티에서 7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살고 있더군요.

-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40여년 전 사각의 링에서 겨루던 분들과 이런 만남을 한다는게 참 신선하게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고인이 되신 신격호 롯데 회장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님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회장님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즉 인연을 매우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 그럼요. “인간관계, 즉 사람이 재산이다”라고 생각해요.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해요. 어릴 때부터 아버님이 주위 분들과의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것을 보며 자란 영향이겠지요.

- 권투선수를 꿈꾸던 학창시절에 어느 미군과의 인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아버님이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후 서울 대한극장 앞 충무로에서 살다 부평으로 이사를 간 거야. 그때 우리 어머니가 미군부대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그 미군부대에서 토마스 탐 케이시라는 분을 만난 거지. 당시 그분이 권투 슈즈랑 트렁크 이런 것들을 많이 지원해 주었지요. 그 덕분에 권투에 더욱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해방 전 신의주에서 살다 1946년 서울로 이주

유복한 어린 시절, 아버지는 광산 운영

가수였던 동생 수철이는 구리에서 목회 활동

 

- 회장님께서는 우리나라가 한창 어려웠던 6.25 한국전쟁이 발발되기 한 달 전쯤인 1950. 5. 26. 출생하셨는데요. 가족 관계는요.

▶ 해방 전에 우리 가족은 신의주에 살았지. 1946년도에 부모님과 두 분 형님, 누나 이렇게 5명이 서울로 내려왔지. 우리 형제 중 내가 서울에서 처음 태어난 거지.

- 집안 형편은 좀 어땠나요?

▶ 잘 살았지. 아버지가 광산도 하셨고.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동전도 집어가고 할 정도로.

- 동생 홍수철씨는 7~80년대 “철없던 사랑” 등 가수로도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동생은 구리시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어요. 신학박사지요. 어릴 때 부터 우리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자신의 책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젊은이에게 자신감 주고파

강연 주제는 도전과 프로정신

프로정신이란,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는 “때가림”

정치계 러브콜 거절, 복싱선수로서 홍수환 자랑스러워

우리나라 정치지도자 부재

- 미국은 베트남에 진것이 아니라 호치민이라는 한 지도자에게 패배

 

- 회장님은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 “링보다 인생이 무섭더라”, “내 인생에도 한 방은 있다” 등 책도 출판하셨는데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는지요?

▶ 책 내용은 거의 다 비슷해요. 그때 당시 우리 사회에 포기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젊은이에게 뭔가 메시지를 주려고 했어요. 작가가 받아서 쓴 거라 사실 내 마음을 제대로 다 담지 못한 부분이 있어 아쉽더라구. 아무튼 내 책을 통해 “지금 힘들고 부족해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 책 출판뿐만 아니라 최근 강연도 많이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강연의 주제가 주로 어떤 건지요?

▶ 강연한 지는 오래되었지요. 27년째 접어드네요. 1994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시작했으니까요. 강연 주제는 대부분 '도전', '프로정신' 이런 것입니다.

- 프로정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요?

▶ 프로정신은 '때가림'이라고 봐요. 프로는 놀 때 놀고, 일할 때 열심히 일할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프로정신으로 도전하자는 겁니다. 연습이 세계챔피언을 만드는 거니까요.

- 참 의미있는 말씀이시네요. 이런 프로정신은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뿌리내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 당연하지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링 위에서는 1회전 공이 울리면 바로 일(시합)에 들어가는 거에요.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모든 부정은 일하기 싫을 때 나와요. 간단해요. 땀 적게 흘리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니 거기에서 부정이 싹트는 겁니다. 오죽하면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겠어요.

- 회장님은 스포츠맨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도 참 조리있게 잘하시고 인문학적으로도 상당히 깊은 내공을 갖고 계시는 것 같은데 혹시 정계에서 러브콜은 없었는지요? 최근 4월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에서 인재 영입이 한창인데요.

▶ 러브콜이 몇 번 있었어도 저는 복싱선수 홍수환이 자랑스럽지 정치 쪽은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실망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 리더가 실종되고 없어요. 베트남을 예를 들어보면 배트남에는 호치민이라는 정신적인 리더가 있자나요. 미국이 베트남에 졌습니까? 호치민이라는 한 지도자에게 진 거죠. 그게 아쉬운 거예요. 국회의원 1명에 9명의 보디가드(비서, 보좌관)가 붙어요. 세계챔피언으로 국위선양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해주지, 잘 살게.(웃음)

- 우리나라도 모두 힘을 모아 잘 살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있었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지요. 비록 민주화의 아쉬움 뭐 이런 것은 있지만 항상 반대쪽에서 끌어 내릴려구만 하니....., 뭉쳐도 살기 힘든 상황인데 말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정치인들은 권투선수보다는 좀 더 똑똑해야 되는데 말이요.

 

헝그리 정신이란 “배고픈 것이 아니라, 지고 못 사는 것”

1966년 김기수 선수 챔피언 보고 권투 입문

육군 일병 홍수환, 세계챔피언 되었지만 혜택은 전무

복싱 역사상 4전 5기는 유일무이

 

- 회장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대표적으로 헝그리 스포츠인 복싱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 제가 생각하는 '헝그리 정신'은 배고픈 것이 아니고, 남에게 지고 못 사는 것을 말해요.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권투 선수는 똑같은 체중으로 서로 이기려고 연습했으니 그러면 서로 비기게 될 것 아니야. 똑같은 조건에서 1:1로 싸우는데 상대방을 이기지 못하는 놈이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 내가 권투를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1966년 김기수 선수가 이태리 선수 벤베누티를 이기고 카퍼레이드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을 먹었어요. 참 멋있더라구, 그게.

- 인생을 권투에 비교한다면요?

 

카라스키야와의 만남. 카라스키야는 지금
카라스키야와의 만남. 카라스키야는 지금 산 미겔리또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다.   홍수환 회장 제공 

▶ 인생, 그거 누구도 몰라요. 보세요. 링에서 마치 원수처럼 싸웠던 카라스키야를 40년이 지난 지금 친구처럼 지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때 그 친구는 내 원수였잖아요. 마지막 쓰러지기 전 로프에 걸려있는 그를 내려치는 걸 함 보세요, 그게 원수지 뭐.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은 참 더도 없이 좋은 친구 되었고 홍수환은 카라스키야 덕분에 먹고 사는거 아니요.(웃음)

- 인생이란게 그런 거군요.

▶ 그럼, 내가 그 친구를 그냥 이겼거나 아니면 너무 잘해서 일방적으로 이겼어도 난 잊혀졌을 거고, 반대로 그가 날 일방적으로 이겼어도 잊혀졌겠지, 둘다. 그런데 네 번이나 다운되고 그 다음 라운드에 KO로 이겼으니 얼마나 드라마틱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기억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복싱 역사에 그런 기록이 있나요? 한 라운드에 4번이나 다운되고 다음 라운드에서 역전으로 이긴 경기.

▶ 그런 케이스는 없습니다. 홍수환, 카라스키야라는 선수 이름은 잘 몰라도 이런 경기가 있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요. 알리, 헤글러, 레너드 등 전설적인 복서들은 많이 나왔지만 그런 경기는 없었어요. 이런 선수들은 그야말로 복싱 신동이었고 나는 카라스키야의 12번째 희생, 제물로 들어가서 4전 5기라는 결과를 얻은 거지.

- 복싱 선수로 생활하시면서 후회는 없었는지요?

▶ 후회는 없어요. 단지 아쉬운 것은 군인 신분으로 세계챔피언이 되었다는 것이야. 챔피언이라고 특혜 제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등병으로 챔피언이 되고 더 어려웠어.

- 챔피언이 되고 난 뒤 청와대로 초청되어 상도 받고 했는데 더 어려웠다니 이해가 잘 안되네요.

▶ 챔피언이 되면 기쁘고 정말 좋을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어요. 육군현역이 프로선수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사실 금전관리도 그렇고 내무반에서 소주 한 잔 따라주면, “술 못 마십니다”라고 하면, “야 중대장이 따라주는 것은 마시고 내가 준 것은 못 마신다고”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하고 음으로 양으로 참 힘들었어요. 챔피언도 되었고 청와대에 초청받아 대통령도 만나고 모든 사람들이 “야, 홍수환 노났다. 이제 운동만 하겠구나”라고 하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정말 “이제는 말할 수 있다”지요.

- 그럼 만기로 전역하신건가요?

▶1974년 7월에 챔피언이 되고 1975년 12월에 제대했어요. 챔피언타이틀 획득 후 1년 6개월 정도 더 하고 34개월 병장 만기 전역을 했지요. 73년 2월 군번이니.

 

펀치 약한 약점, 연습으로 극복, 잽과 발이 빨라

난 프로체질, 아마추어 전적이 고작 2전 2패

권투선수 홍수환 후원자들에게 감사

복싱인생 10년, 내 인생의 경기는 태국 수코타이 선수와 동양타이틀 방어전

권투시장 열악, 경기 대전료도 제대로 못 받아

 

- 본인이 생각하는 권투 선수로서의 약점과 강점 그리고 주무기는요?

▶ 약점이라면 펀치가 좀 약했어요. 41승 중에 14번 KO니까 KO율이 30% 정도인데 그런 KO 승률로는 세계챔피언 되기가 무척 힘들지. 당시 세계챔피언 대부분은 80%대 이상이었으니까요. 자랑이라면, 연습 벌레였다는 거. 아침에 무지 뛰었지. 권투는 다리로 하는 그거던. 또 하나의 장점은 상대방의 잽을 거의 맞지 않았어요.

- 대부분 챔피언들은 잽이 좋았겠네요.

▶ 그렇지. 잽을 거의 맞지 않지. 대신 잘 맞히지. 잽으로 시합을 풀어나가요. 지금도 내가 복싱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직도 복싱은 과학이 아니라는 거야. 자신이 노력한 결과지. 공격 기술이 잽, 원투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이것 밖에 없어.

- 아마추어 복싱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매달 따는 것을 최고 목표로 하는데 회장님도 같은 목표로 시작하셨는지요? 그리고 아마추어 전적은?

▶ 글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김기수 선수가 세계챔피언되는 보고 시작했으니 내 스타일은 아마추어라기 보다는 프로야. 스타일이 아마추어와는달라. 그러다 보니 시합 중 감점도 많이 당했죠. 아마추어 때도 두 번 다 지고 심지어 체육관 내 연습경기에서도 다 지고 사실 한 번도 못 이겨 봤어요. 공식적인 아마 전적은 2전 2패랍니다.

- 2전 2패요? 보통 선수 같으면 복싱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데 오히려 바로 프로 무대에 입문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 나는 애당초 아마추어로 뛰는 것은 싫었어요. 내 경기 방식이 프로였으니까. 1969. 5. 10. 김상일 선수를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는데 진 줄 알았지. 감점도 당하고 했으니 또 졌구나 했는데 양 선수의 손이 동시에 올라간 거야. 비긴 거지. 그때 시합장소가 장춘체육관이었는데 서울과 지방 출신의 차이랄까, 뭐 그런 것이 작용한게 아니었나 싶어요.

- 은퇴 후에 TV 해설가로도 활동하셨죠?

▶ 그랬죠. 오랫동안 했지요. 2018년이던가 박연차 회장님의 지원으로 베트남에 선수를 지도하기 위해 떠나면서 그만두었지요. 7개월 정도 있었는데 아직 내가 베트남에 있다고 아는 사람도 많아요.

- 복싱선수로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아니 지금까지도 이루지 못한 두 체급 세계챔피언이라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기셨는데 특별히 도움이 되었던 스승이나 후원자가 있었는지요?

▶ 많았지. 전 장재식 산자부 장관, 정운수 박사, 김영욱 박사 등 홍수환 후원회 회원들이었지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님 등 참 많은 분들이 지원해 주었지요.

- 회장님은 69년 프로에 데뷔 후 1980년 염동균 선수와의 마지막 경기로 링을 떠났으니 권투선수로는 실제 10년 남짓이었는데요. 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와 그 이유는요?

▶ 내 전적이 50전 41승(14KO) 5패 4무니까 1년에 평균 다섯 번 정도 경기를 했네요. 그중에서도 1973년 2월 9일 태국에서 수코타이 선수와 동양타이틀 방어전이 내 인생의 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 선수는 세계 랭커였는데 난 랭킹에 들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선수를 이겨서 내가 세계 랭킹 4위에 진입했고 세계챔피언에 도전 할 수 있게 된 경기였지.

- 4전 5기 카라스키야와의 경기인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아마도 세계 랭킹에 진입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 경기라서 그런가 봅니다.

▶ 그렇지. 사실 그 경기도 죽도록 맞다가 역전을 했지. 동양챔피언이 되고 나서 경기하는데 매니저가 돈을 안줘요. 당시 경기 수당이 200불,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 받고 한 거지. 계약서도 안 보여 주더라구. 그러니까 제대로 연습이나 했겠어요? 안 했지. 1라운드부터 7라운드까지 죽도록 맞다가 8라운드에서 운 좋게 이긴 거지. 이런 경우도 있어요. 1971년 11월 7일 한국에서 경기하고 닷새 후인 11월 12일 괌에 가서 시합을 했어. 그런 경기를 이길 수 있겠어. 졌지. 매니저를 잘 만나야 돼요.

 

운 좋게 세계 랭커 진입, 세계챔피언 도전 길 열려

한 편의 드라마,“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군 복무로 체중 조정 안돼 시합 전 12.5kg 감량, 젊어서 가능

세계챔피언은 대통령 표창, 피아노 콩쿠르 2위 입상은 대통령 훈장, 예·체능 분야 차별 존재

당시 프로 스포츠는 복싱과 레슬링 두 종목

 

- 아무튼 세계랭킹에 들어가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드디어 1974년 세계챔피언의 문을 두드립니다. 당시 WBA 밴텀급 챔피언이었던 아놀드 테일러 (Arnold Taylor, 1945년생, 남아프리카공화국, 41승 17KO 8패 1무)의 도전자로 낙점된 당시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아놀드 테일러와의 시합을 알리는 포스터    홍수환 회장 제공
아놀드 테일러와의 시합을 알리는 포스터.        홍수환 회장 제공

▶ 당시 테일러 선수가 나를 굉장히 얕잡아 본거야. 동양에 있는 코리아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기나 했겠어요? 겨우 태국 수코타이 선수를 이겨 랭킹 4위가 된 선수니까 이 친구를 불러 1차 방어전을 쉽게 치르자 이런 속셈이 있었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지명되었던 거지요.

- 당시 경기가 열렸던 장소가 우리나라에는 너무 생소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이라는 곳인데요, 그곳까지 이동은 물론 시차 적응도 쉽지 않았을 텐데 승산이 있었습니까?

▶ 더반까지 가는데 약 35시간이나 걸렸어요. 힘들었어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계약서도 보여 주지 않고 시합을 해야했고, 매는 내가 맞는데 돈은 지들이 가져가고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시합이다, 여기서 지면 더 이상 권투는 안 한다 그런 생각으로 갔어. 다행히 결과는 좋았어. 군대생활도 힘들고, 매니저는 군인인 나를 그냥 방치하고 14주만에 군에서 나오니까 체중이 68kg이야, 54kg를 유지해야 되는데. 14킬로 감량해야 해요. 시합을 55.5kg으로 잡아서 12.5kg을 뺏다니까, 며칠 만에.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거야, 이제는 말할 수 있다지.

- 아이고, 그게 가능한건가요?

▶ 젊어서 할 수 있었지. 젊었으니까. 내가 존경하는 것은 젊음밖에 없어. 무조건 저질러야 돼.

- 그 경기 승리 후 모친과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통화에 많은 국민들이 한 번 더 감동하게 되는데요, 요즘처럼 전화통화가 쉽지 않는 시절이었는데 그 때 상황을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그렇지. “엄마”가 아니고 “엄마야”, 내 엄마인 것을 확인하는 거지. 당시 라디오로만 중계되었자나요. 질 거라고 TV가 안 온거야. 사실 비하인드 히스토리인데 1회전에 다운을 시키고 하니 이길 수도 있겠다라는 분위기로 바뀐거야.

그래서 MBC 이철원 아나운서가 MBC에 바로 연락해서 방송국에서 엄마를 모셔 방송국에 엄마를 대기시켜 놓은 거지. 좋은 결과 나오면 바로 인터뷰를 딸려고 말이야. 그게 우리나라 장거리 전화 1호야. 홍수환과 엄마의 통화가 장거리 전화 1호라고.

- 참으로 각본 없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지요. 챔피언 획득하고 귀국 환영도 대단했지요?

▶ 공항에서 서울시청 환영행사장까지 엄마를 옆에 태우고 카퍼레이드가 벌어졌지. 환영 인파도 대단했고. 이제 우리 엄마 식당 쟁반 그만 날라도 되겠구나, 뭐 얼마나 좋아요 자존감이 대단했죠

- 당시 복싱은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은 종목이었지요.

▶ 그랬죠. 당시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는 복싱과 김일 선수로 대표되는 레슬링밖에 없었지요. 야구, 골프, 축구 이런 것이 없었으니 국민들이 권투를 좋아 할 수밖에 없었지요.

-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그 당시 군 복무중이었는데 명예 제대나 공로 전역 같은 것이 없었는데 참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온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국위를 선양했는데 말입니다.

▶ 스포츠가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비슷한 시기에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제에서 2위 입상을 했는데 대통령 훈장을 받았어요. 그런데 세계챔피언이 된 나는 훈장이 아니고 표창장을 받은거야, 그때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알아요. 차별 받은 거지, 대한뉴스 992호를 한번 보라구요. 정명훈과 홍수환의 귀국이라는 내용이 나와.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네요.

▶ 그리고 참 운도 없었던 것이 내가 청와대에 초청되어 간 것이 7월 18일인 그래요. 그 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서거를 했쟈나요. 박지만과 중앙고등학교 8년 선배인데 그런 상황에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지. 그것도 다 내 운명이지 뭐.  식당도 확장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복싱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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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홍수환 회장. 그때 그는 군인신분이었다. 홍수환 회장 제공
홍수환 회장이 세계챔피언이 된 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훈장은 받지 못 했다. 홍수환 회장 제공

 

난 강자에게 강해, 피하지 않아

깔보고 맞으면 죽어, 내가 맞은 가장 센 주먹은 KO률이 낮은 선수

자모라에게 유일하게 2패, 자비로 부담한 2차전 패배 후 쫄당 망해

- 권투 비즈니스의 패배, 홈 어드벤티지 전혀 없어

전 재산 몽땅 날리고 비난 여론에 시달려, 진 놈이 무슨 말이 많아

 

- 홍 선수에게 유일하게 2패를 안긴 알폰소 자모라에게 1975년 3월 LA에서 2차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게 되는데, 당시 그 선수의 전적이 18전 전승 18KO로 그런 강한 상대를 도전자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 센 놈인걸 알았지. 그런데도 난 피하지 않았어, 성질 자체가 센 놈을 이기는 것을 좋아 하거던. 그게 동물의 세계 아니요. 내 자신감은 센 놈 한데는 이겨. 강자에게 강해요. 그리고 할 맛이 나. 내가 맞아 본 선수중에 가장 센 주먹은 KO률이 별로 없는 선수요. 깔보고 맞으면 가거든. 카라스키야가 그런거자나. 난 그 선수가 센 주먹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선수는 내가 센 놈이란걸 몰랐던 거지.

- 결국 사모라에게 챔피언 벨트도 빼앗기고(4라운드 KO패) 1976년 10월 리턴 매치에서도 패배했는데 그 경기가 상당히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요?  대전료(12만 달러)도 자비로 부담했다지요?

▶ 그 시합을 후원하는 스폰서가 없었지. 그때 자모라가 26전 26KO 승이야. 해봐야 지는데 TV 중계를 왜 하며, 프로모터가 붙겠냐고, 하면 지는데. 종로에서 삼화양복점을 하는 이일호 사장님 하고 우리 목욕탕 팔고 12만불을 주었지. 12만불을 줘야 오더라구. 어쨌든 쫄딱 망했지.

- 보통 자국에서 시합을 하면 우호적인 나라에서 주심을 맡는데 챔피언 국가인 멕시코에서 주심(옥타비오 메이란)과 부심을 지정한게 의외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홈 어드벤티지가 반영되지 못했네요.

▶ 그렇지. 전혀 없었지.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한몫 따고 들어가는데, 한국권투위원회 행정력이 못 따라간 거지. 계약할 때 주심과 부심 둘은 제3국, 선수 양국에서 한 명씩 이렇게 했으면 내가 서둘지 않았지. 판정으로 가도 되니까. 비지니스에서 실패한 거지. 그렇게 많은 대전료를 지불했는데도 말이야.

- 결국 12회 멕시코 주심의 석연찮은 TKO패 선언 이후, 링에 올라 주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다가 구금되기도 하는 등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팬들이 혹시 홍선수가 링을 떠나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 우리 가족 전 재산을 날렸지. 언론에서는 “막 내린 홍수환 시대, 국제 망신, 진 놈이 무슨 말이 많아” 뭐 이런 비난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 난 오히려 다시 한번 하자 그런 생각을 먹고 큰 누나에게 30만원 받아 하와이에서 필리핀 선수를 이기고 재기했어요. 염동균, 다나까 후따로 등 그 이후 벌어진 3경기를 모두 이겼지. 정신력으로 버텼지, 그러니까 복이 오더라구.

 

사자성어 7전 8기를 4전 5기로 바꾸다

한국 알리려 우리나라 전통 갓 쓰고 링에 올라

클린치 없는 스타일, 다운 당해도 공격 앞으로

시합 결과는 연습의 결과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 아마추어는 칼이 나올 때, 프로는 나오려는 기미가 보일 때 피하지

 

- 드디어 역사적인 경기를 마주합니다. WBA 쥬니어 패더급이 신설되고 초대 챔피언 결정전이 1977년 11월 27일 파나마에서 열렸지요. 상대 선수는 프로경력 1년 7개월 홍 선수보다 10살이 적은 17세, 그러나 11전 11KO승이 말해주듯이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카라스키야, 당시 승산이 있었는지요?

▶ 승산 없었지. 진짜 쓸쓸하게 떠났어요, 파나마로. 당시 LA에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송해 선생님, 이은하씨 등과 동행했는데 송해 선생님이 “수환아, 꼭 이겨라 어이”라고 응원해 준 것을 아직 잊지 못해요.

- 저도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경기를 보며 흥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쇼맨쉽 같아 보였지만 우리나라 전통 갓을 쓰고 등장한 것도 참 인상적이었는데, 미리 준비하셨나요?

▶ 대한민국을 알릴 방법을 생각했지. 아놀드 태일러 시합할 때 미처 태극기를 준비 못 했었어요. 그래서 파나마에 나가 있는 코트라에 가서 담뱃대와 삿갓이 있는지 물어봤지. 거기에서 갓을 구해 쓰고 링에 올라갔다가 몇 번 흔들고 쫙 던졌지.

- 결국 공이 울리고 2라운드에서 홍선수는 4번의 다운을 당합니다. 여기 오기 전에도 당시 경기를 봤는데요 오히려 다운을 당한 선수가 뒤로 물러나거나 클린치보다 전진 공격을 하더라구요. 상당히 의아했습니다. 홍 선수의 권투 스타일인가요?

▶ 홍수환의 경기에는 클린치가 없어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클린치, 나를 좀 살려달라는 건데 그게 싫어. 내가 약간 감성적인 것, 오기 같은 것, 영화처럼 꼭 터지고 나서 때리는 거, 먼저 싸움 걸지 않고 몇 대 맞고 난 뒤에 달려드는 것, 의리의 주먹 같은 거지 뭐. 좋게 말하면.

- 세 번째 다운을 당하자 중계하던 아나운서가 “아, 역부족이군요, 역부족”라는 말이 참 안타깝게 들리던데요,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 아물아물하지. 정확히 이야기하면 다운이 되면 대부분 무의식 상태가 돼요. 술 많이 먹고 취한 후 아침이 되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처럼. 그 뒤에는 그냥 무의식 상태에서 연습한 대로 육감으로 반응하는 거지. 그만큼 연습이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 그럼 다운 이후는 연습의 결과라고 보면 되겠네요.

▶ 그럼. 연습의 결과지. 자동 반사적으로 피하고 주먹이 나오고 하는 거야.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아마추어는 칼이 나올 때 피하고, 프로는 나오려는 기미가 보일 때 피하지.” 프로는 그런 감, 무의식 상태의 감이 무지 중요한거야.

- 그 경기 이후, “실패를 거듭해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라는 사자성어 “7전 8기” 라는 말이 “4전 5기”로 바뀌지 않았나 하는데요, 회장님의 전화번호도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요?

▶ 그럼요. 7전 8기는 성경말씀에 있고, 하느님이 아마 나를 좋게 봐준 건지 4번 쓰러지고도 다시 일어나서 이겼던 거지요. 그래서 7845전화번호를 쓰고 있어요.

- 국민들은 그 경기를 보면서 정말 많은 카타르시스, '포기하지 말자'라는 희망을 가졌는데요. 그 경기 후 홍수환 키즈 이런 현상은 없었는지요? IMF때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골프선수 선수 박세리 키즈처럼요

▶ 허허허, 수환 키즈는 없었네요. 우리나라 지인진 선수가 세계 챔피언 벨트를 반납한게 2007년인가 이후 13년 동안 세계챔피언이 없어요. 우리 경제가 좋아졌는지 골프 치러 가지 권투선수는 없잖아요.

 

인기 가수 옥희와의 스캔들, 많은 국민들 실망

1회 버팅으로 눈 부상, 억울한 패배

세계챔피언 타이틀 잃고 징계, 2년 6개월 동안 시합 없어

1980년 염동균 선수와 시합이 마지막 은퇴경기

오기나 배신감 없어, 권투선수 홍수환을 사랑해 준 국민들께 감사

 

- 1977년 일본에서 1차 방어전을 치른 이후 회장님의 사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국민들로부터 비난과 욕도 무척 얻어먹고 여론이 상당히 악화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는지요?

▶ 1차 시합 전에 이미 가수 옥희를 만나 서로 알고 좋아했던 시기였어요. 일본에서 1차 방어전 할 때 내 운전기사가 가수 옥희 차를 빌려 영업을 한거야. 성질이 남자 같은 옥희가 난리가 난거지. 왜 내 차로 손님을 태우고 다니면서, 나는 차가 없어 무대에 가서 노래도 못하게 하냐라면서. 그러니까 나와 옥희 관계를 알고 있던 이 운전기사가 앙심을 품고 본처에게 고자질한 거야.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그냥 묻혀 지나갔는지도 몰라. 그런데 그걸 그렇게 떠들고 왜 욕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내 사랑 찾아가는데 그게 욕 얻어먹을 짓이냐구요. 조강지처를 버리고 옥희와 사랑에 빠졌다, 이런 것은 다 이유가 있잖아요. 부부관계는 이불 속 두 사람만 아는 것 아닌가요. 내가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돈을 훔친 것도 아닌데.

- 당시 우리나라의 유교적인 정서가 그렇지 않았나요? 이미 부인이 있는 당대 최고의 복싱 스타와 인기가수의 불륜 스캔들, 그러니까 언론에서도 당연히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요?

▶ 좋아, 그래 스타니까 참견하는건 좋아요. 그런데 왜 시합을 안 시키냐구요. 주먹으로 먹고사는 놈에게 염동균과 은퇴 경기할 때까지 2년 반 동안. 대한민국이 이러면 안 되지. KBC에서 시합 인정을 안 해 준거야.

- 그러니까 제대로 훈련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충체육관에서 카르도나와 2차방어전이 치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12회 TKO패라는 경기 결과로 이어진 것인가요?

▶ 아니 질 걸 졌냐구요. 보여야 시합을 할 것 아니요. 눈을 깜빡거리면 더 안보이는 거야, 찐득찐득해서. 경기룰은 3회 이내에 주먹이 아닌 버팅으로 부상을 입으면 재시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1회 버팅으로 심하게 부상을 입었는데도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어요. 이렇게 눈 부위가 찢어진 것은 권투하면서 처음 당한거야. 버팅으로. 챔피언 그대로 뺏기게 한거지. (그가 내민 눈 주위에는 아직도 상처가 선명함)

- 보통 타이틀 매치할 때 질 경우를 대비해 옵션 같은 거 행사하지 않나요, 다음 경기를 위해

▶ 있었지. 자 보세요, 나와 카라스키야 경기 때, 내가 카라스키야에게 이기면 가사하라와 1차 방어전을 하게 되어 있었지. 2차 방어전인 카르도나 경기에서 내가 이기면 아라시다라는 일본인 프로모터는 옵션이 끝나고 카르도나가 이기면 옵션을 또 가지는 거야. 그래서 재시합을 막은 거지. 주최측인 KBC가 경기를 중지시키고 재시합하도록 해야 되는데 그냥 3라운드를 넘겨버리니까 피만 줄줄 흘리다가 진 거지. 아까운 세계타이틀을 그렇게 잃어버리게 하냐구.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거야. 바보같은 OO들!

- 이 경기 후 최선을 다하지 않았네, 부인 옥희를 구타했네 하는 여러 이유로 KBC는 홍선수에게 2년 출장정지 중징계를 내렸는데, 재기의 꿈을 완전히 접었던 것인지요? 세 체급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지요?

▶ 재기하려구 마음먹었지만 KBC가 내 시합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다른 선수에게 챔피언 타이틀 매치 시키려구 나를 안 시킨거야.

- 2년 6개월 후 염동균 선수와의 경기를 끝으로 아쉽게도 링을 떠나게 되는데요 권투선수로서 오기나 배신감 같은 것은 없는지요?

▶ 없었어요. 두 번의 챔피언, 특히 4전 5기에서 국민들이 보여 준 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선수로서는 은퇴를 했지만 장정구 선수 등 후배들을 지도하고, 저는 지도자로서도 권투를 떠나지 않았어요. 지금도 복싱을 떠나 살 수는 없어요. 그렇게 복싱에 몰두하고 권투에 준 내 마음을 국민들은 다 아는데 복싱관계자들은 너무 소홀히 하고 몰라요, 그게 참 가슴 아파요.

- 많은 국민들에게 아직도 “4전 5기, 영원한 챔피언” 복싱선수 홍수환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이 생활하시는데 부담스럽지 않는지요?

▶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기억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시니 늘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씩씩하게 살고 있는지 몰라요.(그날,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분들이 찾아와서 인사하는 분들이 많았음)

 

KBC 회장으로서 위기에 빠진 권투시장 활성화에 주력

권투인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

대한체육회 가입 등 산적한 숙제들 많아

우리 국민들께 호소, 경기장에 많이 찾아와 달라

 

- 2012년부터 한국권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계시는데요. 현재 우리나라 권투 시장 상황은 어떻습니까?

▶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 2012년 비상대책위원회 이사회에서 임기 4년 회장에 선출되었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있어 그만두었는데 2014년 2월인가 법적으로 이긴 사람이 찾아와서 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더라구요. 그래서 권투인들끼리 싸우지 않는 조건으로 회장직을 맡게 되었어요. 그런데 KPBF(2002년), KBA(2014년), KBF 등 권투 시장이 사분오열되고 찢어졌어요. 통합해도 힘든 상황인데 말입니다.

- 최근 격투기 시장은 UFC, K1, 로드 FC 등 권투가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수도 부족하고 경기 자체가 열리지 않은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봅니다. 타결책은 없을까요?

▶ 권투인들이 통합하고 힘을 모아야되요. 저도 임기가 끝나고 해서 회장직을 내놓은 지도 오래 되었어요. 그런데 맡을 사람이 없어요. 제 개인 체육관을 대치동에서 운영하며 후배 선수들 시합은 시키고 유지하려고 하는데 선수가 안 나옵니다. 안타깝습니다.

- 프로복싱은 WBC, WBA 양대기구 체제에서 IBF, WBO 4대 기구 17개 체급으로 확장되면서 챔피언으로 기회가 한층 많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 국내 권투시장 활성화 방안이 없을까요?

▶ 앞에서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지인진 선수가 2007년 챔피언 벨트를 자진 반납한 이후 13여 년 동안 세계챔피언이 없어요. 동양챔피언도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사적인 욕심보다 서로 힘을 모으는 지혜가 필요한데 박차고 나가 버리니 제대로 될 일이 없지요.

한국권투위원회가 대한체육회에 등록이 안 돼 있어요. 행정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아마추어 복싱에는 1년에 예산을 100억 넘게 지원하는데 프로연맹에는 한 푼도 지원해 주지 않아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신준섭, 김광선, 박시헌 등 3명이에요. 세계챔피언은 44명이나 되는데 말입니다.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도록 프로연맹이 힘을 모아야 됩니다. “홍수환을 적극 이용하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도 호소 드립니다. 프로 스포츠가 자생력을 키우려면 표를 구입해서 경기장에 많이 찾아주어야 되는데 표를 구입해 입장하는 관중도 없습니다.

-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이웨더나 한국계 골로프킨 등 유명 선수의 경기를 한국에 유치할 계획은 없는지요? 복싱시장 재건을 위해 상당히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 좋은 생각입니다. 일본 권투도 죽다 살았어요. 유명한 헤비급 챔피언 마이클 타이슨이 두 번이나 일본에서 시합한 것이 일본 복싱을 살린 거지요. 이런 선수들을 활용해야 되는데 기업에서 지원이 없으니 힘들지요. 관중도 없고 시청률도 안나오고 선수도 없고 하니 당연히 기업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겁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 프로복싱 선배로서 후배 복싱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 권투로 이익을 보신 분들은 권투시장에 투자해야 합니다. 배신하면 벌 받습니다.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분신과도 같은 권투에 투자하라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100세 인생, 늘 도전의 연속

대구, 경북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사수를 통해 자유민주주를 지킨 긍지의 고장, 스스로 자존감 높여야

저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국민께 감사

 

- 이제 권투선수 홍수환, 홍수환 회장에서 일흔이 넘은 어르신 홍수환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는 65세 인구가 14%를 넘어 고령사회가 되었습니다. 100세 시대에 살고있는 지금, 회장님께서는 100세 인생 노후를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는지요?

▶ 도전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도전하는 꿈을 꿉니다. 도전하다 죽으면 섭섭하지 않지만 도망가다 죽으면 창피하지요.

- 도전할 분야는요?

▶ 권투지요. 마음 같아서는 헤비급으로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웃음)

- 인생 후반전, 같은 시대를 살고있는 대구, 경북지역에 계시는 시니어분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 대구, 경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국 사랑이 짙게 배어있는 곳입니다. 내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바쳤던 곳이지요. 그만큼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뭉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도 끝까지 이 나라를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선열들의 노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 그런 정신을 잊어버리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도전합시다.

- 마지막으로 복싱선수 홍수환을 기억하는 많은 팬들이 대부분 연세가 제법 든 노년기를 맞이하거나 이미 나이 많으신 어르신입니다. 그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저를 기억하고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 더 부탁드린다면 유튜브에 '장군의 소리'를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저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 긴 시간 진솔한 말씀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시니어 매일'을 위해 사인 하나 남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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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학 2020-02-27 06:58:18
인생은 도전 ~
글을 읽는동안 더 실감 나는군요 !
지금도 멋진 인생으로 도전하시는모습에 귀감이됩니다.
건강 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이용근 기자님도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글 편히 보았습니다.

곰소항구 2020-02-25 09:34:54
가난했지만 희망을 가지고 살던 시절이었지요.
헝그리 정신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정신이 다시 필요한 시기입니다.
멋진 인터뷰 기사 잘 읽었습니다.

유무근 2020-02-24 20:46:07
홍수환 자서전 같은 자상한 권투 일대기 잘 읽었습니다.
홍수환 선수를 더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용근 기자님 좋은 기사에 감동이구요() ()

shalom 2020-02-24 19:58:59
긴 글 막힘없이 잘 읽었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홍수환 선수가 크리스찬인 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네요
지금껏 잘 살아오셨다니
역시나 홍수환입니다
그리고 이용근 기자님도 대단하시군요
시인의 감성이 끈질긴 기자근성으로 다시 태어남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