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내가 내 자신을 통역한다."
(49)"내가 내 자신을 통역한다."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02.24 12:4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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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은 장벽을 넘어서는 소통, 진실과 감동으로 기쁨을 공유하는 언어활동이다.

2020년 2월 9일(현지),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상》 4관왕을 이룩하며 한국영화 100년의 새 역사를 썼다. 이 영화는 작년에 제72회 《칸영화제》( 19. 05. 14-25, 프랑스 칸)에서 ‘황금종려상’, 올해 초,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20.01.05. 미국 LA)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73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런던, 20.02)에서 ‘각본상’과 ‘외국어영화상’을 받은데 이어서, 이번 《오스카상》 수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으로 4관왕의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4관왕은 92년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백인 우월주의 장벽을 허물어 버린 동시에, 오스카상의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문화 강국을 대한민국의 위엄을 과시하는 쾌거였다.

이번 봉준호 감독의 세계적인 성공 배후에는 숨은 공로자들이 있었다. 먼저 ‘기생충’의 각본과 자막(字幕)을 영어로 번역한 달시 파켓(Darcy Paquet,1972∼ )이다. 그는 한국 특유의 정서를 영미(英美) 세계에 잘 전달한 영화평론가 겸 자막 번역가 로 한국에 18년째 살고 있는 미국인이다. 그의 노련미는 극중 ‘짜파구리’를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ramdong)’으로 만든 것과 “서울대학교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거 없나?” 라고, 관객을 웃기는 송강호의 이 대사에서 '서울대' 대신 'Oxford'로 번역한 재치로 영화를 살려냈다.

그 다음은 봉감독의 통역자로 빛나는 최재성이다. 미국 언론의 극찬을 받은 그녀는 작년 5월 프랑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부터 봉감독과 함께한 미국 이름 ‘샤론 최(Sharon Choi)’이다. 2019년 12월 9일, 지미 펄론(Jimmy Fallon)이 진행하는 미국 NBC의 유명 토크쇼, ‘The Tonight Show’에서 봉감독의 대담을 연필도 메모판도 없이 완벽하게 통역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번 수상 무대에서 봉감독의 진심이 담기면서도 재치 넘치는 수상 소감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영화 비평과 영화 산업 관련 소식 웹사이트 《인디와이어, IndieWire》가 “봉준호 감독의 통역자, 샤론 최가 이번 오스카 시즌의 MVP였다”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봉감독도 “그녀는 정말 놀라워요. 어떻게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통역사입니다” 라고 감탄했다.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언어의 마술사’라는 칭호를 받은 그녀에게도 남모르는 고민은 있었다. 2월 19일 미국 연예주간지 ‘버라이어티’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 실력이 아닌 운 덕분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불안해하는 심리)에 시달렸다”고 겸손하게 고백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10초간 명상을 하며 ‘사람들은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다, 내게 관심 없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불안을 극복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보다 필자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20년간 나는 내 자신의 통역사였다”라는 그녀의 ‘삶의 철학(生哲學)’이다. 통역은 장벽을 넘어서는 소통, 진실과 감동으로 기쁨을 공유하는 언어활동이다.

필자는 “내가 내 자신을 통역한다”라는 말을 접하는 순간, 잠시 아찔하며 놀랐다. 이는 유학(儒學)의 핵심인 수신(修身)이다. ‘자기 통역’은 남에게 말을 할 때, 두 번 세 번 생각하며 상대편의 마음을 배려한다는 의미이고, 이를 실천한다는 신념이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들을 때도 그 말의, 그 목소리의 ‘속뜻을 깊이 되새긴다’는 것이며,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삶의 철학을 의미한다. 20대 후반의 여성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얼마나 말을 함부로 하고, 함부로 듣는가? 오늘날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 사회 전반에, 특히 방송과 신문에, 정치 현실에서 모두가 실천해야 할 정신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