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7)-능금꽃
녹슨 철모 (47)-능금꽃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2.1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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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는 정문에서부터 기가 죽는다. 여기 오면 헌병들도 군단보다 키가 크고 인물도 잘생기고 씩씩해 보인다. 건물들도 크고 웅장한 게 천국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천국에는 천사가 있듯이 육본에는 아름다운 여군들이 있다. 군복을 입고 착착 발맞춰 오는 그녀들을 보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태원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면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전방이나 군단에는 여군이 없었다. 전방에는 아예 여자조차 없고 군단에는 식당 아줌마와 이발소 미스 김 둘이 여자인데 그건 호적상 여자이지 실물은 이미 남성화되어 아무리 그녀들을 들여다보아도 예쁜 남자보다 더 남성적인 모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부대에서 여군이 있는 부대에 오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행복감이 솟아올랐다.

부군단장의 심부름을 마치고 볼 일을 다 보았다는 생각에 2호차(부군단장 차)를 부대로 돌려보내고 그 길로 태원은 동대문운동장으로 갔다. 장군의 심부름으로 외출하였다면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하는 게 관례인 탓에 그는 마음 푹 놓고 그의 모교가 시합을 하고 있는 야구장으로 간 것이다. 야구장에 들어가니 태원의 모교는 상대 학교와 동점이다가 막 지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운동장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실업 야구에는 손님이 없고 고등학교 야구장에는 이렇듯 손님이 꽉 차는 것은 진정 야구를 사랑해서라기보다 고향 팀이 이기는 것을 보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애향심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런 현상을 야구의 열기 운운하며 치켜세우는 언론이 우습다는 이야기다. 

야구는 다시 동점이 되어 연장전으로 들어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겨우 태원의 고교가 역전승을 하고 야구는 끝이 났다. 대학 다닐 때부터 태원은 야구장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물론 운동경기를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보다 상대방 응원단들이 야유를 하고 고함지르다가 태원의 학교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할 때 느끼는 쾌감이며, 간혹 터지는 홈런은 모든 서울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느낌이어서 그 재미로 학교를 빼먹고도 응원을 갔다.

 

기분 좋은 밤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니 야단이 났다. 부대에서 전화가 열 번도 더 왔었다는 것이다. ‘태원이 돌아왔냐’고, 뭣 때문에 요란을 떤 걸까? 생각하며 다음 날 부대로 출근을 하니 인사참모가 불렀다. 어제 무슨 일로 육본에 갔느냐고 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있으면서 그의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당신, 이제 죽었어! 어제 부 올빼미가 얼마나 찾은 줄 알아? 왜 심부름 갔으면 바로 돌아오지 않고 옆으로 샌 거야?" 

그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진정으로 걱정하며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는 등을 밀어 부군단장 방으로 그를 들여보냈다.

"어디 갔다 왔어?" 

부군단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때는 화가 많이 났다는 표시다.

“동대문야구장에 갔다 왔습니다.”

"야구장에 왜? 거기가 육본이야?"

“표는 무사히 반납했고 시간이 남아 제 고등학교 야구 응원을 갔습니다.” 

태원은 적당한 핑계를 찾다가 그게 사내답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드디어 박살이 나는가 보다. 곧 그 특유의 큰 목소리로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여기며 몸을 사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몇 대 몇이야?" 

엉뚱하다 싶게 부군단장이 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처음엔 지다가 저희 학교가 3대 2로 역전했습니다.”

“야, 당신도 야구는 되게 좋아하는구먼. 그래 표는 양 중령을 만나서 반납한 거야?"

"네, 그분이 받으며 '역시 정 소장님은 확실한 분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양 중령이 "당신의 부군단장은 베트남에서부터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유명했다"며 "이 표도 남 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반납하는 걸 보면 역시 정 장군답다"고 칭찬하더라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양 중령 그 친구는 우리 맹호부대 작전참모였지. 진짜 사나이야.”

부군단장도 덕담을 결들인 칭찬의 말을 했다. 태원이 부군단장 방을 나오니 작전참모와 군단장 비서실장은 가슴을 떨고 있다가 웃으며 나오는 태원을 보고 저게 실성했나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양손을 귀에 올려 뿔을 만들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군단장이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더냐는 표시인 모양이다. 태원은 이를 보고 버르장머리도 없이 의기양양하여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 방에서 나왔다.

 

다음 날 새벽 또 크게 전화가 울렸다. A 관사(군단장 관사)에서 부른다는 것이다. 보통 부대에서 응급환자가 생기면 구급차가 그를 데리러 오는데 이런 때는 1호차(군단장 차)가 온다. 군단장 차는 같은 지프라도 쿠션이 다르다. 마치 승용차를 탄 듯 승차감이 좋다. 재빨리 의무실을 들러 구급낭과 혈압기 등을 챙겨 들고 위생병과 관사로 달렸다. 사모님이 새벽에 졸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혈압을 재어보니 정상이었다. 얼굴을 보아도 별 병색이 없었다. 이럴 경우 병력 청취가 중요하다. 부관 김 소령을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두 분이 혹시 다투지나 않았습니까?"

"며칠 전 군단장님이 외박을 하셨는데 그날 밤 사모님이 서울서 관사로 전화를 했어. 물론 통화가 불가능했지. 그 일로 어젯밤 사모님이 와서 두 분이 밤새 다투다가 아까 새벽에 쓰러진 거야.”

“그렇다면 안정제나 주사하고 갈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사모님도 자신의 병을 아니까 당신 부르는 걸 싫어했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내가 당신을 불렀는데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됐어. 가보시오.” 

태원은 별을 몇 개씩 단 분들은 하느님 같아 보여 부부싸움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였지만 남녀 관계의 일이란 높으나 낮으나 같은 원리로 홀러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태원은 선영과 함께 야외로 갔다. 시내 가까운 곳에 나지막한 야산이 있어 둘은 그 언덕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골치가 아프거나 힘들 때면 바로 이런 풀밭이나 초원을 떠올려요. 어릴 때 소 먹이러 산에 많이 다녔어요. 그래선지 난 풀밭이 그렇게 맘을 편하게 할 수 없어요. 초원을 생각하면 모든 시름이 다 사라져요.”

그녀는 풀잎을 하나하나 따면서 그렇게 말했다. 태원이 옆으로 그녀를 보니 병원이나 다방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역시 능금나무는 산에 오니 제 모습이 나네요."

“선영씨가 산에 오니 더 매력적으로 보인단 말이에요." 

그녀는 빤히 그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면서 말을 했다.

“실장님도 그런 말을 다 할 줄 아네...” 

태원은 ‘감사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내가 능금꽃이면 뭐해요. 우린 부화되지 못할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인데 뭐.”

“왜 알이 부화되지 못한단 말이에요?"

“태원씨도 잘 알고 있잖아요? 우리가 처녀 총각이에요?"

'우리'라는 말, 그리고 알을 품고 있다는 말에 태원의 가슴은 매우 흐뭇했다.

그렇지만 결국 부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태원은 화도 나고 가슴도 찡해졌다. 갑자기 태원은 선영을 난폭하게 풀밭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세게 빨았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게 열려 있었다. 태원의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녀 역시 태원의 입술을 빨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태원은 더욱 더 세차게 그녀를 껴안으며 깊은 입맞춤을 했다. 그녀가 태원의 가슴을 밀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원의 이런 일방적인 감정 표현에 선영은 하늘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마치 그녀는 태원의 이런 행동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자 태원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까 마른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르던 정욕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식으며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침묵으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선영은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오래 전 거기서 보고 느꼈던 순수하고 깨끗한 감정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지금의 이 감정이 정말 순수하고 깨끗한 감정에서 출발한 것인지 스스로 되뇌고 있었다. 잠시 그녀는 자신이 결혼한 여자란 걸 잊고 있었다. 태원은 자신의 행동이 선영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안절부절못했다. 선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왜, 놀랐어?"

태원이 물었다.

“아니.” 

그녀는 웃었다. 그러면서 눈물을 찍어내었다.

“지금 울고 있잖아? 나는 아무래도 너무 감정적인 인간인가 봐. 이곳에서 유 소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이었어. 이런 감정을 유 소위에게 허락받기도 힘들었고...”

"잠시 나도 내가 결혼한 여자라는 걸 잊고 있었어요. 당신은 마치 처음 키스하는 사람처럼 왜 그렇게 서두르고 난폭했어요? 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런 행동이 순수함을 포장한 가식은 아니겠죠? 나도 나의 순수함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과연 그것이 우리의 이런 행동을 합리화해줄 수 있을까요?"

“굳이 합리화할 필요가 있을까? 난 나의 감정을 합리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사람이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듯 나 또한 당신에 대한 감정은 꽃을 보고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라고 늘 생각해왔어. 이것도 나의 합리화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린 문화와 제도라는 틀 속에서 살고 있잖아요. 당신이, 또 내가 아무리 순수함을 주장한다 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불륜이라고 치부할 거예요.” 

선영은 스스로 불륜이라는 말을 하고도 자신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 감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정말 불륜이란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또 다른 표현은 없는 것일까?’ 선영은 또 다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