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준의 '마음 한철'
박 준의 '마음 한철'
  • 김채영 기자
  • 승인 2020.04.01 10:14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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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준의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7. 6. 30.

 

시적 서정이 내 정서에 맞는다고 할까. 요즘 잘나가는 시인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박 준 씨라 답할 것 같다. 2년 전이었던가. 박 준 시인이 문학포럼에 출연한다는 모교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시간이 안 맞았다. 아쉽던 차에 마침 A도서관에서 특강이 열렸다. 한달음에 찾아갔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시집을 챙겨들고 딸과 동행했다. 앳되고 호감형인 청년과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다. 사인 받으려고 줄을 선 팬들도 시인 또래의 젊은 층이 대부분이었다. 넓은 공간을 꽉 메운 방청객들, 그의 인기를 실감하고도 남았다. 시집이 꽤 팔리고 강연도 많이 다닌다했다. 마치 내 자식 일처럼 뿌듯하게 들렸다.

‘미인’은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이겠다. 여자들은 대개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 머리손질부터 한다는데 하필 왜 통영에 가자마자 머리를 했을까? 연인에게 잘 보이기 위함은 아닌 듯하다. 통영이란 지명에서 백석의 흔적을 쫓았던 한철 내 마음이 겹친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묘사는 좋으나 느낌은 좋지 않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그러지 못했음을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에서 가늠할 수 있다. 절벽, 영정, 이별의 뜻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리라.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는 과거완료형 시구에서 청춘의 한 사랑이 어긋났음을 유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