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작은 칼에 '一片心(일편심)' 혼을 새긴다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작은 칼에 '一片心(일편심)' 혼을 새긴다
  • 강효금 · 이원선기자
  • 승인 2020.02.01 12:1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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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종군 씨
대학원서 장도 역사· 자료 수집
유럽 전시회 방문객 감탄 연발
아내와 장· 차남 이수자 길 걸어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종군 씨가 도신을 살펴보고 있다. 작은 칼 제작에 전통의 혼을 불어넣는다.   이원선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박종군 씨가 도신을 살펴보고 있다. 작은 칼 제작에 전통의 혼을 불어넣는다.     이원선 기자

 

“장도(粧刀)는 단순히 여인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몸에 차고 다니던 도구가 아닙니다. 남녀 구분 없이 자신의 신념과 절개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 파고드는 악함을 도려내기 위해 장도를 지녔습니다.”

국가무형문화재기능협회 이사장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粧刀匠) 박종군(57) 씨. 그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 장도에 정신을 불어넣는다. 장도는 도신(刀身)과 칼자루, 칼집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도신은 강철을 수없이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단련’을 거쳐 만들어진다. 너무 물러도 너무 단단해도 쓸 수 없기에, 쇠를 벼리는 담금질은 20~ 30번 반복된다. 800도 열과 30도의 물에 넣기를 되풀이하며 강철을 다루는 일은 온 정신을 쏟아야만 하는 중노동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장도를 만드는데 더 세밀한 작업이 남아 있다. 바로 칼자루와 칼집의 모양내기다. 그 재료는 먹감나무부터 황옥, 백옥, 금, 은, 소뿔, 거북등껍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양내기는 백동장, 나전장, 낙죽장 등 온갖 기예가 동원된다. 그의 공방에는 갖은 연장과 도구가 갖추어져 있다.

 

“가족이 함께 외식한 기억이 한 번도 없어요.”

그는 광양에서 70여 년간 장도를 만든 부친 박용기(1931~2014)씨로부터 장도를 배웠다. 14살 때부터 장도를 익힌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장도를 잊지 않았다. 10원을 벌면 100원어치 재료를 사들여 장도를 만들기에 어머니는 ‘빚이 재산’인 삶을 꾸려야 했다. 실패를 하면 다른 길을 찾을 법도 한데 아버지는 평생 장도를 위한 외길 인생을 택했다. 힘든 형편을 잘 알기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가업을 잇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대학진학을 권했다. 체계적인 이론의 바탕 위에 전통을 새롭게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버지는 전통은 옛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서 새로이 창조되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다. 대학원에서 장도의 역사를 되짚어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체계화시켜 방향을 제시하고, 완성도 높은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가르침 때문이었다.

 

박종군 장도장이 만든 금은장환갖은사각대모첨자도. 조선시대 임금들이 지녔던 것으로 거북등껍질을 재료로 만들었다.  이원선 기자
박종군 장도장이 만든 금은장환갖은사각대모첨자도.
조선시대 임금이 지녔던 것으로 거북등껍질을 재료로 만들었다. 이원선 기자

“우리의 장도는 우리의 정신을 표현합니다.”

그는 장도에 ‘일편심(一片心)을 새긴다.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그 글씨를 새기며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는다. 혹자는 일본도가 좋다고 이야기한다. 양날칼인 일본도는 남을 해치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장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본질부터 다른 것이다. 임 향한 마음을 지키겠다는, 그 뜻을 잊지 않기 위해 여인들은 노리개 삼작이라 하여 장도를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 또 ’패도‘라 불리던 사대부들의 장도는 실생활에서도 요긴하게 쓰였는데, 종이를 자르거나 나이 어린 손자의 팽이를 다듬고 과일을 깎기도 했다.

 

“희생의 대물림이지요. 하지만 소중한 희생입니다.”

1남 4녀 가운데 둘째로 자라면서 그가 본 것은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었다. 어머니는 입이 닳도록 교사가 되어야한다고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루 빨리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일손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만큼 장인의 삶은 절박했고 위태로웠다. 굳이 그 힘든 삶을 따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예 분야의 인간문화재 가운데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수제자가 직계 가족이다. 그만큼 그 자리는 희생이 따라야하기에 영리만을 보고 온다면 머물 수 없는 자리다. 그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그 깨진 독에서 새어나온 물이 땅에서 새싹을 틔운다”고 말한다. 장인의 길은 아름다운 희생, 그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이어받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국가의 자산입니다.”

우리나라에 ‘전수교육관’은 150여 곳이 넘는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설립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운영비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하도록 되어 있다. 지방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거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경우, 전수교육관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전통문화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국가의 자산이다. 전수교육관의 운영에도 중앙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힘을 합쳐 충분하게 지원해준다면, 장인들은 원천기술을 지키며 헌신으로 보답할 것이다. 박종군 장도장은 말한다. 눈에 드러난 자극적인 것들만 좇지 말고 ‘정적인 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이 무형의 자산은 우리 역사이자 뿌리이고 선조의 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서다. 우리는 훌륭한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활용하는데 인색하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칼은 처음 보았다.”

2008년 파리 전시회에서 박종군 장도장이 들었던 이야기다. 처음 자리한 유럽무대라 그는 작품선별에 고민이 많았다. 전시목적으로 15점, 판매목적으로 10점을 가져갔는데 거래가 성사된 것은 전시품 1점, 판매품 10점이었다. 첫 유럽무대치고는 대성공이었다. 명함만 받고 구두 계약한 16cm 옥장도 2,500만 원짜리는 어찌될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생계를 영위하기도 쉽지 않은 공예분야가 유럽 땅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놀랍다” “신기하다”는 감탄을 들으며, 그들이 가진 여유와 문화에 대한 애정이 한없이 부러웠다고 했다. 언제쯤이면 우리 사회도 장인의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을까. 결혼을 앞둔 신랑·신부에게 장도를 선물하고, 성인이 되는 아들·딸에게 의미를 담아 장도를 선물하는 그런 일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싶어한다.

 

미대를 나온 아내(정윤숙)와 큰 아들(박남중)이 이수자의 길을 걷고 있다. 군대를 제대한 전수장학생인 둘째 아들(박건영)도 올해 이수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쉽지 않은 길, 그 길을 3代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에서 길을 만드는 사람. 길의 끝에서 새로이 스스로 길이 되는 사람의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