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⑳바람은 봄을 재촉하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⑳바람은 봄을 재촉하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0.01.30 16:1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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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을 쇤다는 것은 명절 끝, 농사 시작의 신호
쑥떡 먹고, 연 날리며 봄맞이

동지(冬至)에 이어 정월 초하루의 설, 정월대보름, 이월 초하루의 이월'로 계속되는 명절은 다가 올 농사일을 대비한 긴 휴식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일곱째 해에는 땅을 쉬게 하여 지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땅이나 사람이나 원기 회복(refreshing)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월'을 끝으로 농촌은 다시 보리밭 매고, 거름 내고, 논 갈고, 못자리 만드는 일로 다시 농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예로부터 부잣집에서는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고 풍물을 치며 하루를 즐겁게 지내도록 했다.

추위로 봐서는 아직 겨울인데 달력은 입춘(立春)을 알렸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 그대로였다. 소평마을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3월말에 얼음이 얼고 4월에 눈이 내릴 때도 있었다. 기록을 보니 1966년 3월 25일에 중동댁 논에 얼음이 얼었다.

사람들은 이월' 아침에 바람을 관장하는 영등할매가 내려온다고 믿었다. 농사에 바람은 햇빛, 비와 더불어 중요한 조건이었기에 농부의 아내는 정성껏 아침밥을 짓고 밥이 다 되면 부엌에서 경건히 소지(燒紙)를 올렸다. ‘다황(唐黃, 성냥, 당황을 다황으로 불렀다)' 불을 갖다 대는 순간 닥나무 종이(창호지) 조각은 불꽃을 일렁이며 천정으로 타 오르고, 재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내려올 기미가 보이면 농부의 아내는 재빨리 두 손을 벌려 쳐 올렸다.

입춘을 앞두고 학봉어른(정응해 씨)은 붓을 잡을 일이 많았는데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글씨를 받으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입춘을 맞이하여 길운을 기원하며 따스한 날씨를 맞아 경사가 많기를 기원하는소박한 바람이었다. 이때 사다 둔 문종이로 소지를 올리고 방문(房門)을 새로 발랐다.

연날리기 하던 들판. 정재용 기자
연날리기 하던 들판. 정재용 기자

아이들은 연날리기를 했다. 대나무와 문종이로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만들어서 하늘 높이 날렸다. 큰거랑 쪽이나 앞공굴 쪽에서 많이 날렸는데 해마다 새깨댁 앞 포플러에 연을 거는 아이가 있었고 까치는 눈만 뜨면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 줄 수 없고 오로지 태풍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레가 없으면 그냥 나무 막대에 연줄을 감았다. 연줄은 무명실 한 타래면 됐다. 연을 띄우기 위해 보리밭을 달리다 보면 서릿발에 부풀어 올랐던 흙이 발밑에서 푸석거렸다. 자연스럽게 보리밟기가 되니 논 주인으로서는 고맙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냥 높이 날리기로 심심하면 연싸움을 벌였다. 연싸움을 위해서는 연줄에 유리가루를 먹이는 것이 필수였다. 소주병을 깨서 잘게 빻아 그 유리가루를 밥풀과 섞어 연줄에 먹였다. 꿉꿉하던 연줄은 하룻밤만 자고나면 바싹 말라 있었고 소년은 그 연줄을 얼레에 감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연싸움은 서로 연줄을 어긋맞게 대고 얼레에 감긴 연줄을 당겼다 풀었다하여 상대방 연줄을 끊어 먹는 게임이다. 팽팽하던 연 두 개가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갑자기 하나가 양동산 쪽으로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면 싸움은 끝났다. 연줄이 끊어지는 순간 얼레를 잡은 손도 맥이 풀리고 긴장에서 놓인 연은 긴 줄을 늘어뜨린 채 하늘 높이 사라져갔다.

이월에 해 먹는 떡은 쑥떡이었다. 아직 해쑥이 나지 않아 묵은 쑥을 버지기(장독 뚜껑으로 쓰이는 옹기그릇)에 담갔다가 도구통(절구)에 넣고 찧었다. ‘볶은 콩을 먹으면 새와 쥐가 없어져 곡식을 축내지 않는다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고, 콩고물을 만들어 쑥떡을 버무리고, 남은 콩고물로는 밥을 비벼서 먹었다.

이맘때 가끔 마을에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맹수 같아서 잠시 한 눈을 파는 순간 아궁이를 탈출한다. 잠에서 깬 아기는 젖 달라 울고 콩죽은 넘고, 나뭇가지를 발로 차 넣으며 솥을 젓던 농부의 아내는 넋을 잃는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거의가 짚을 땠다. 저녁밥을 짓거나 소죽을 끓이기 위해서 고무래로 재를 긁어낼 때 불씨가 남아 있으면 잿간에서 불이 났다. 마을 변두리 집에서 불이 날 때면 방화에 의심이 갔지만 증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펌프와 소방용품들. 정재용 기자
펌프와 소방용품들. 정재용 기자

밤중에 불이야!” 소리가 들리면 마을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읍내에 소방서가 있지만 거리가 멀어서 무용지물이었다. “철컥철컥펌프질 소리, 개 짖는 소리, 우르르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 “어디? 누구 집?”, “우야꼬(어떻게 하나)” 묻고 탄식하는 소리가 골목에 찼다. 어른들은 물동이, 고무다라이(큰대야), 세숫대야, 버지기, 바케스(물통)를 이거나 들고, 아이들은 양푼, 바가지에 물을 담아 불난 집으로 몰려들었다. 지붕에 올라갈 수 있도록 사다리 두어 개가 놓이고 용감한 장정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멍석으로 널름거리는 불꽃을 덮었다. 물그릇은 릴레이식으로 지붕으로 전달되고 추녀를 타고 떨어지는 물은 소나기 내린 듯 마당에 질퍽거렸다. ‘속불(이엉 속에 붙은 불)’을 잡느라 낫으로 이엉을 걷어 마당으로 던지고, 불이 짚 볏가리나 옆집으로 번지지 못하도록 거기도 멍석으로 덮고, 낫으로 까추(처마에 잇대어 달아낸 움막)를 뜯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일하면서 싸우는향토예비군처럼 소평마을 사람 전원은 일할 때 일하고 불 날 때 불 끄는의용소방대원이었다.

이월 쇠고 나면 바로 보리밭 초벌매기가 시작됐다. 아무 것도 없는 빈 흙을 긁는 것 같았지만 독새(뚝새풀)는 벌써 움을 트고 있었기 때문에 호미 간 곳과 안 간 곳은 풀이 날 때보면 확연히 구분됐다.

하루가 다르게 큰거랑 둑의 버들개지 움이 부풀고 달래 냉이 새싹을 내밀었다. 뜰의 매화도 꽃망울을 터트려갔다. 아이들은 새 학년 기대에 부풀고 농부는 논갈이 할 쟁기를 챙겼다. 희망의 봄이자 등골 빼 먹는 농사는 그렇게 다시 시작된 것이다. 볕이 따스한 어느 날, 농부는 달걀 여남 개를 둥우리에 넣어주고 암탉은 기다렸다는 듯이 푸드덕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