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유림의 얼굴, 최재림 경상북도 향교발전위원장
경산 유림의 얼굴, 최재림 경상북도 향교발전위원장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1.29 16: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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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와 선조들의 정신 계승 발전 위한 하양읍지 편찬,
경북향교발전위원장으로 유림계 20여 년 종사,
향교전교 ㆍ육영재훈장 등 교육문화지킴이 활동, 고향을 지키는 소나무 같은 80년 삶,
경산지역 유림계에 20여년 종사하면서 큰 업적을 남긴 최재림 경북지역 향교발전위원장이 하양향교 대성전 내삼문 앞에서

급속한 자본주의 발달과 산업화로 인한 빠른 변화와 성장 속에서도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에  담긴 가치를 계승 발전 시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일 것이다. 하양에서 태어나 80평생 고향을 지키며 전통문화와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미래로 나아갈 디딤돌을 만들기 위하여 하양읍지를 편찬하고, 이 고장의 교육문화 지킴이, 경산 유림의  얼굴로 한평생 지역사회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최재림(84세) 경북향교발전위원장을 인터뷰했다.

하양향교 명륜당 전교실 주변에 걸린 하양향교 유래 및 중수기 등 편액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연로하신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내 고장 일을 위하여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쏟으시는 열정에 성원을 보냅니다.  평생 하양 고향을 지키면서 성장한 과정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저는 하양읍 한사리 최씨 집성촌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하양초등을 졸업하고 대구사범병설중학교로 진학하자 6.25전쟁이 일어나 기차를 타고 하양에서 대구까지 통학하면서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럭비부 선수로 지목되었으나. 럭비선수가 되기 싫어 도망다니다가 두들겨 맞기도 하고, 그러다 2학년이 되어 남들보다 1년 늦게 럭비를 시작했고 후보로 전국대회인 종별선수권대회까지 출전하기도 했지만 운동으론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럭비부를 그만두고 합숙훈련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정상적으로 못했으며, 대학 갈 형편도 안 되고 졸업 후 한동안 집에서 책 읽고 운동만 했습니다. 유명했던 정치풍자를 비롯한 신문 기사 전체를 하루도 빠짐없이 다 읽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하양중학교 행정담당 겸 체육 강사로 임용되어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양향교 명륜당 기로실 주변에 걸린 명륜당 중수기 등 편액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21개월 근무 후 입대했고 육군병참학교에서 34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결혼하고 복직하여 공민과목인 일반사회 수업도 하고 지역의 각종 단체에도 참여하여 사회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20여 년을 지내다가, 1988년에 신라섬유에서 현재의 동부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여 행정실장으로 일하다, 1996년 예순이 되어 퇴직하였습니다. 더 오래 학교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 나이 70대인 선배들이 많이 작고하는 것을 보고 이제 지역을 위한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향에 살다보니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많았습니다.

하양향교 행사때 경상북도 향교발전위원장 자격으로 격려사를 하는 모습.

▶평생 동안 하양 고향에 살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활동하신 경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고향에서 교직생활을 하다보니 문중, 향교, 육영재, 청년회, 체육회, 육성회, 노인회, 번영회, 위원회 등에서 총무, 전교, 훈장, 회장, 고문, 위원장 등 직책을 맡아왔으며, 중요 직책으로는 하양읍 읍지 편찬위원장, 하양향교 전교, 육영재 훈장을 했습니다. 현재는 경산시 번영회장, 경상북도 향교발전위원장, 경산시노인회 분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양향교에 문중대표로, 수석 장의로, 전교로 2년 7개월동안 활동하면서 하양향교의 내외삼문, 동재, 전수청 등을 정비했다.

▶ 위원장님께서 주요 활동 내용 중에서 하양읍지 편찬 경위와 의미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1933년에 화성지(花城誌)가 출간된 이후 80년이 넘게 지역사회의 향토사가 편찬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미래로 나아갈 디딤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읍지편찬은 전통문화와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996년에 한문으로 된 화성지 국역작업에 참여했는데, 화성지는 하양 허씨 문중이 주도한 후원으로 편찬된 읍지였습니다. 국역작업 후 종친 어른께 혼도 났지만, 그때 읍지편찬의 필요성과 의미를 깨닫고, 언젠가 제대로 된 읍지편찬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07년 1월부터 편찬위원장 자격으로 12개월에 걸쳐서 발간한 703쪽 분량의 하양읍지.

지역개발사업으로 대학리 서사리가 사라질 상황에 처하여 더 늦기 전에 후세에 남길 읍지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박규홍, 전영권, 김종국, 정호완 교수님을 집필위원으로 구성하고 편찬위원과 재원문제로 2-3년 고민하다가 하양읍장의 호응과 경산시장의 지원으로 2016년도에 예산을 세우고 2017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현대 인물을 어느 범위까지로 게재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 쟁점 사항들을 잘 마무리하면서 703쪽 분량의 하양읍지를 1년만에 완성했습니다.

전영권 교수 등 4명 집필위원, 편찬위원과 2007년 12월 발간한 하양읍지 발간사 내용.

▶ 위원장님께서 가장 오랜기간 동안 하양향교에서 활동하신 내용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1996년 지역사회를 위한 일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퇴직 후에 하양향교에서 일을 보면서 처음에는 문중대표로 활동하다가, 다음에는 수석 장의로, 2005년부터는 전교로 2년 7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하양향교의 내외삼문, 동재, 전수청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하양읍 교리길20길 12-5번지 마을 끝부분 언덕배기에 위치한 하양향교 전경

원래 향교는 지방의 학교로 국가에서 관리하였으며, 재관(齋官) 또는 재장(齋長)을 두어서 향교의 관리와 유생의 교육업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지금은 교육기관으로서의 업무가 없어지고 문묘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 관리만 하고 있습니다. 향교의 책임자를 전교(典校)라고 하는데 지방문묘를 수호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윤리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양향교 대성전 옆 가장자리에 중종 14년(1519)에 대사성(大司成) 윤탁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년 된 은행나무 보호수가 향교를 지켜주는 듯하다.

▶ 위원장님께서는 경북향교발전위원장으로서 서원과 비교할 때 현재 우리나라 향교의 발전방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전국에는 234개의 향교가 있고, 경북에는 39개의 향교가 있으나, 서원과 비교해 볼 때 기존 향교는 공자와 성현을 받들어 추모하는 봄 가을의 석전제례 등 중요행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닫혀 있었다는 폐쇄성, 조선시대에 교수 훈도 교도 등 벼슬아치가 근무하고 양반자제들이 많아서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힘있는 기관으로 주민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양향교 명륜당 전교실 주변에 걸려있는 하양향교 중수기 등 편액 모습.

오랫동안 일반인과 여성의 향교 출입은 거의 없었다는 차별성 등으로 지금까지 너무 먼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대한민국 서원이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당당히 등재되고 주민과 가까이 하기 위한 향교가 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양향교 기로실 주변에도 대성전 중수기 등 수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 위원장님께서 하양 육영재 훈장으로 활동하였다고 하는데 육영재는  무엇을 하는 기관입니까.

- 육영재는 훈장을 추대하여 지역의 각 서당과 서원, 향교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교육하고, 여기서 또 인재를 선발해 서울 성균관으로 진학시켜 과거에 응시하도록 했습니다. 하양 육영재는 대구의 낙육재, 영천의 삼일재 등과 함께 지역 3대 영재교육기관이며, 요즘의 특목고와 비슷한 성격의 고등교육기관이었으며, 가끔 백일장도 열고 특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440번지 야산 언덕배기에 위치한 육영재 전경.

1822년 하양 유림의 건의에 따라 당시 환성사 절 안에 있던 안양실을 경산시 하양읍 동서리 440번지 현 위치로 이건하고 본당 5칸, 관리실, 대문채 등을 지었습니다.  육영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유림의 재물헌납 등 유지관리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며,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정기총회에는 많은 유림이 참석해 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육영재의 의미를 계승하여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육영재의 대청에 걸려있는 편액을 전문가에게 의뢰해 번역한 자료집을 발간했습니다. 육영재는 과거의 인재양성 기능이 사라졌지만 선배 제현들의 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곳이며, 유림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후손에 물려줘야 합니다. 제가 2012년부터 육영재 훈장으로 활동하면서 예산 1억 원 정도를 지원받아 육영재 보존을 위한 경북도 지방문화재 신청, 진입로 개설, 주차장 확보를 했습니다. 육영재 진입로 개설을 위해 대구에 거주하는 한 토지 소유주를 일곱 차례나 찾아가 토지매각을 설득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여 할 수 없이 진입로를 꾸불꾸불하게 개설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육영재의 상징적 의미와 보전의식을 되살린 보람은 있었습니다.

하양 육영재는 대구의 낙육재, 영천의 삼일재 등과 함께 지역 3대 영재교육기관이다.

▶ 위원장님께서는 경산유림연합회 활동사항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저는 2015년부터 2016년까지 2년은 경산유림연합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경상북도 항교발전위원장으로 4년째 활동하면서 유림에서 총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국유림총연합회는 예학 연구 및 예문화를 통한 우리나라 전통문화 계승발전과 세계적인 도덕종주국으로 재정립을 위해 2007년 5월 30일 법인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주요사업으로 예사상과 예문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 한국인의 효사상과 전통문화 연구 계승발전, 가정문화의 정착과 가정교육을 위한 교육의 본연 연구와 인성교육 제공, 한민족의 민족사상과 가치관 연구 등을 하고 있습니다.
육영재는 지역의 각 서당과 서원, 향교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교육하고, 여기서 또 인재를 선발해 서울 성균관으로 진학시켜 과거에 응시하도록 했다

저는 조상의 좋은 전통과 정신을 계승,보전하는 것과 치인(治人)은 못하더라도 수기(修己)를 삶의 근본으로 생각하면서 문중 총무를 9년 맡았고, 경산종친회장으로도 활동하면서 문중행정을 체계화하고 관리를 현대화했습니다.   앞으로도 경산지역 유림 발전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하여 점점 무너져가는 인륜의 도리와 인간성 회복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하양 육영재는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 풍광이 수려하다.

▶ 위원장님께서 현재 경산시 번영회장으로 지금까지 활동 내용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순수한 민간단체인 경산시번영회장을 5년째 맡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전통을 지키고 민주시민의식 제고를 위한 강연, 안보교육, 유림 및 새마을지도자들의 구정 신년인사회 등의 행사도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간혹 일반사회 과목을 가르친 경력으로 강사로 나서 직접 강연도 하고 있습니다.  마당을 넓히고 정원과 팔각정을 만들어 1715년까지 하양고을 소재지가 한사리임였음을  기념하여 팔각정 이름을 동헌정(東軒亭,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보다 쉬는곳)으로 편액했습니다.

하양 육영재 유래를 설명하는 표지석이 육영재 건물 앞에 세워져 있다.

▶ 위원장님께서 그 밖에도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신 활동 사항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2014년 말부터는 경산북부노인복지회관 경로당의 사정이 어렵다고 책임을 맡으라고 해서 노인회 분회장을 맡아 건축한지 30년이 된 경로당을 6년째 보수해서 완공했습니다. 일지회를 통해서는 ‘윤리와 도덕이 숭상되는 더불어 행복한 사회 만들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1960년부터 하양체육회, 청년회 활동을 지속해왔고 하양초등총동창회장, 하주초등학력관리위원장 등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소임을 맡아 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하양향교 정문 역할을 하는 솟을삼문 모양의 외삼문 모습

▶ 위원장님께서 평생 하양에서 고향을 지키면서 사신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하양읍 한사리 540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결혼해서 살림난 집이 576-3번지인데 거기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고, 강바닥의 자갈돌처럼 능력이 모자라고 힘이 없으니 이렇게 머물러 있었던 거지요. 좋게 말해서 고향을 지키는 사람이지, 옛날로 치면 선산을 지키며 사는 ‘갓지기’ 라 했겠지요. 산을 지켜야만 떠나간 사람들이 죽어서도 돌아올 수가 있으니 나름 의미는 있지만 고향에서 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출향인사들이야 고향에 와서 열만 해도 열다섯을 한 만큼 빛이 나는데, 고향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 열다섯을 해도 열을 한 만큼도 인정받기 어려워서,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좁은 지역에서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안 당하고, 선생소리 듣고, 명절에 외롭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주니 고맙지요.

명륜당 강당에 걸려 있는 성균관 3대 지표 액자

▶ 위원장님께서는 고향에 사시면서 하양지역의 문제점과 개선책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흔히 경산의 세 고을(하양, 자인, 경산현)을 이야기 할 때 ‘하자경’이라고 부르는데 왜 그렇게 불리는지 아는가요. 세 개 현이 합쳐져 경산군이 된 오랜 기간 동안 세 고을 중에 하양이 그중 인물과 문화가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고 봅니다.  경산에는 사액서원이 하양의 금호서원 밖에 없는 점이 이를 말해주지요.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떼 ‘하양에서는 점심으로 비빔밥 한 그릇 먹고도 노래한다’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순수 토박이는 25% 정도밖에 되지 않고  선조들의 좋은 정신과 전통, 지역의 역사를 알고 각자의 근본에 충실해야 우리 사회가 바로 선다고 봅니다.

하양향교가 소재하는 교리마을 입구에 있는 연못의 가시연과 미루나무가 한가롭게 보인다.

최재림 향교발전위원장님은 여든이 지났지만 마을 청소도 손수 다 하시며 연로하신 형수님까지 챙기셨다.   

고향마을 하양 한사리 입구 버드나무 고목 보호수가 최위원장을 상징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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