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외래어 과용 시대의 유감
(44) 외래어 과용 시대의 유감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01.20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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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우리 글, 민족의 혼을 지키는 확고한 정신이 필요하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1446)을 반포하여 백성들이 널리 사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어난 이 새 문자는 한자에 대한 ‘속용문자(俗用文字)’ 라는 뜻으로 상말 언(諺) 글월 문(文), 즉 언문(諺文)으로 비하되는 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언문은 한자에 덧붙여 사용하는 가용(加用)의 표기, 한문을 풀이하는 언해(諺解)에 사용되었고, 한문을 모르는 궁녀들이 주로 쓰는 문자였다.

반포 후, 447년이 흐른 갑오경장(1894) 때 공문서에 한문을 폐지하고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도록 정하는 변화를 맞이했다. 그러자 민간에서는 혼용체가 아닌 순한글체 만을 사용하는 언문일치 운동이 일어나면서, 언문을 나랏말, 즉 국문(國文)이라고 했다. 1910년 이후, 일제의 탄압을 받던 암흑기도 변화가 일어나서 ‘한글’이라는 새 이름이 가지게 되었다.

한글은 1910년대에 주시경(周時經) 선생을 중심으로 한 국어연구가들이 ‘으뜸가는 글’, ‘하나 밖에 없는 글’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1928년에는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꾸었고, 1931년에는 그 동안 음력으로 기념해 오던 한글날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로 정했다. 그 후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오늘날의 10월 9일이 되었다.

해방 후, 1948년 10월 9일 한글 전용법이 공포되었다. 갑오경장 규정을 재확인 하는 그 전문은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 라고 법제된 변화였다. 이 법은 2005년 「국어기본법」에 그 내용이 포함되면서 폐지되었다.

1957년에는 한자를 폐지한다는 전제로 임시 허용한자 1,300자를 정해 사용하다가 1972년부터는 단계적으로 폐지를 시도하였다. 그러자 ‘한글 전용은 위헌이다.’ 라는 저서가 출간될 만큼 찬반양론이 격렬했다. 그래서 고유명사 등에는 괄호를 쳐서 한자를 부기하는 잠정조치가 내려지고, 교육용 한자 1,800자가 확정되는 혼돈의 역사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글과 한자의 오랜 공존과 갈등이 평온해 진 오늘날, 우리는 서양에서 들어온 외래어 과용 시대 살고 있다. 동네 거리에 나서면, 살롱드에스, 베스킨라빈스, 세븐일레븐, 파스쿠찌, 투썸플레이스, 엔제리너스, 등 의미를 알 수 없는 외래어 간판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카페, 음식점, 편의점의 명칭뿐만 아니라, 대구 시내에서 볼 수 있는 아파트 이름도 외래어 투성이로 되어있다. 월드메르디앙, 파크리전시, 아너스, 센트로팔레스, 그리고 호텔 이름도 라온제나, 엘디스리젠트, 베키아스위스로젠, 더벰부, 등 셀 수 없는 외래어가 범람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외래어 과용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선 과일이나 채소처럼 언어에도 신선미(新鮮美)가 요구된다. 시어(詩語)에서 신선미가 생명인 것처럼 일상적인 언어에서도 이국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새롭게 돋보이려는 심리가 강하다. 이러한 말과 글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크기 때문이다. 남보다 돋보이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그 자체가 진부(陳腐)한 실패이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KB국민은행, ibk기업은행, NH농협, MG새마을금고처럼 이름 앞에 마치 모자를 쓴 것처럼 알파벳을 추가하여 드러내려고 한다. 얼마 전에 어떤 지자체에서 경로당을 새로 지어 ‘OO실버센터’라는 간판을 달았다가, 거센 항의에 못 이겨서 다시 ‘OO경로당’으로 고쳤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공무원이 근무하는 곳이 이미 ‘읍사무소’나 ‘면사무소’가 아니라, 모두 ‘OO행정복지센터’로 변경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전국적으로 지자체의 간판을 교체하는데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면서 왜 이렇게 바꾸었는지 알 수 없다. 행정과 복지는 그대로인데 이름만 바꾸는 발상, 외화내빈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 말, 우리글, 민족의 혼을 지키는 확고한 정신이 필요하다. 왠지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난듯하여 무언가 ‘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