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날 단상(斷想)
그믐날 단상(斷想)
  • 정신교 기자
  • 승인 2020.01.2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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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산격동에서 출발해서 학창 시절의 추억이 깃든 대봉동을 돌아 동창의 출판기념회장에 도착하니, 입추의 여지가 없다. 장관을 역임한 화려한 경력에 걸맞게 축하공연과 축사가 길어져서,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봉덕동은 오랜만이라서, 시장기를 참고 지하철이 연결되는 영남대 로터리까지 걷기로 하였다. 미군 부대 부근이라서 음식점들이 이국적이고 서먹한 가운데, 겨우 한식당을 찾아 들어서니 배달 음식을 포장하던 초로의 사내가 반갑게 맞아 준다. 고봉의 쌀밥에 듬성듬성 무가 섞여있는 소고기국을 게눈 감추듯이 비우고 나서니, 겨울 저녁이 푸근하다. 로터리를 건너고 비탈길을 오르니, 옛 생각들이 두서없이 와닿는다. 또래의 사촌들이 있는 작은 집과 누나들이 다닌 교육대학이 지척이다.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역에 내려서 가끔 찾는 헌책방에 들렀다. 전국적인 브랜드 서점인데, 실내가 트렌디하고 아늑해서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다. 최근 서적들을 기웃거리다가, 주저하지 않고 ‘82년생 김지영을 꺼내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주인공인 김지영이 태어나서 학교와 직장생활, 결혼해서 겪는 성차별과 피해들을 일화 형식으로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3인칭 소설이다. 2016년도에 출판되어 밀리언 셀러에 오르고, 대만과 일본, 중국, 영국, 프랑스 등지의 해외에서도 출간된 화제작으로 정치권에서도 남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산업화 과정을 겪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자녀로 대변되는 주인공 김지영, 구태의연한 남아선호 사상과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에 의하여 피해를 입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이로 인하여 산후 우울증과 육아 우울증이 겹치는 정신 이상증을 겪게 된다.

작가가 연대 별로 제시한 일화들은 독자들에게 추억이 어린 공감을 줄 수 있을 만큼,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가정에서의 식사 문화, 대중교통, 진학 문제, 대학 동아리 활동과 구직, 그리고 면접과 직장 생활에서 김지영이 겪는 일들이다.

다만 비교적 유복하고 자녀 교육에 헌신적인 서울의 중류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이, 원하는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또래의 유능하고 성실하며 사려 깊고 이해심이 있는 남성과 결혼해서, 출산과 육아의 시작 단계에서 우울증이 발생한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최근의 페미니즘에 편승하여 지나치게 남성을 비하하여 우리 사회의 여권 신장 분위기에 역행한다는 비평도 있다.

자꾸만 김지영 씨가 진짜 어디선가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의 말미에, 작가는 가공의 인물인 김지영과 같은 여성에게 더욱 많은 기회와 선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며늘아, 이제 그만하고 너희 집에 가서 부모님 모셔라.”

서방, 자네도 명절 제사 모시러 가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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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아빠가 올해 지공거사가 되더니, 치매가 온 것 아냐?”

 

* 지공거사: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65세 이상 고령자 층을 일컫는 속어.

KTX 소녀(갤럭시 노트에서 저자 그림)
KTX 소녀(갤럭시 노트에서 저자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