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4)
녹슨 철모 (44)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1.2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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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군단장 주사 놓으러 다니느라 힘이 드네요.”

또 푸념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 큰 눈을 치켜뜨며 진지하게 물었다.

"군단장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일은 무슨....”

심드렁하게 태원이 대답했다.

"그럼 왜 주사를 주는 거예요? 무슨 주산데요?"

그녀는 직업의식이 발동하는 듯 질문했다.

계속 진지하게 물어대지만 태원은 빨리 이런 이야기를 그만두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여자들을 만났으면 이야기는 벌써 딴 곳으로 넘어갔을 것인데 유 소위를 만난 뒤로는 이렇게 그녀의 의도대로 이야기가 이끌려갔다.

"주사는 S.M과 P.C예요. 먹는 약은 없고요."

간단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더욱 궁금한지 계속 물었다.

"그런 항생제를 쓴다면 무슨 염증이 있다는 거 아니에요? 어디에 염증이 있다는 거예요?"

“유 소위, 나는 3급 ‘비밀취급인가자’요."

유 소위는 이 말의 뜻을 몰라 그를 쳐다봤다.

“유 소위는 비밀취급인가증이 없고요.”

유 소위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 때 이런 버릇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태원의 말이 어려워 그걸 풀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군단장 신상의 변화는 1급 비밀이에요. 나는 3급 비취인가자(비밀취급인가자)밖에 안돼 나도 무슨 병인지 몰라요. 더구나 유 소위는 비취인가자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알 자격도 없고요. 군의감이 진찰하고 통합병원장이 처방한 걸 내가 간호사 노릇하고 있는 거요.”

그제야 그녀는 대강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에는 주사를 주다가 그 양반도 긴장이 되었는지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고 나도 긴장이 되어 주사기를 떨면서 꽂았어요. 이런 탓에 주사기 바늘이 다 들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휘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요?"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근육주사도 잘 못 주는 군의관이라 생각하니 고소한가 보다며 태원은 그녀의 웃음에 말을 계속하였다.

"하늘이 노래졌어요. 휘어진 주삿바늘 외에는 준비해 간 게 없으니까 그걸 다시 펴서 써야 되는데 소독도 안 된 내 손으로 바늘을 펴도 될지, 설사 퍼지더라도 다시 꽂다 부러지면 이때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잠깐 멍하게 서 있었어요. 그러자 낮고 위엄 있는 군단장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주사 안 놓고 뭐해!’라고요. 식은땀이 등줄기를 흘러내렸어요. 에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떨리는 손으로 주삿바늘을 바르게 고친 다음 쿡 하고 찔렀어요.”

그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물었다.

“성공했어요?"

표정이 궁금하다기보다 성공을 바라는 눈빛 같아 태원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잘했어요. 태원씨.”

갑자기 그녀는 태원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다시 고쳐 말했다.

"잘했어요. 실장님.”

태원도 ‘고마워요, 선영씨’라고 실수한 척 말하려다 참고 말았다.

태원은 유 소위를 만날 때마다 두 가지 마음이 생겼다. 자신이 겪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군의관이나 간호장교일 때만 실감이 나는 내용이어서 어디 가서 말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유 소위와 이야기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던 직업인 간호사에다 또 항상 내심 깔보던 여자라는 존재와 별것도 아니 일을 갖고 조잘대며 재롱을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실장님은 최전방 생활을 하셨잖아요? 군단도 전방 전투부대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병력의 숫자나 위치상 전방 같은 실감은 나질 않거든요. 같은 부대라도 최전방과 군단, 양쪽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많죠?”

유 소위는 조사 나온 사람처럼 물었다. 태원은 속으로 좀 다른 이야기를 했으면 했지만 유 소위의 말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려서 군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야 천양지차죠. 여기도 군대의 특징은 있지만 민간 사회와 많이 흡사하고요. 전방은 이런 곳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고 있어요.”

그는 말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그건 마치 유 소위님과 내가 같은 군인이면서 또 다른 인간인 것처럼.”

이 말에 유 소위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래요. 실장님과 저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도 경상도와 전라도로 다르고 같은 의료인이지만 의사와 간호사로 또 다르죠. 같은 인간이면서 또 남자와 여자라는 것도 다르고... 그런데 이런 다른 것들이 서로 만나서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게 재미가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태원은 생각이 달랐다.

“유 소위는 그렇게 생각해요? 난 안 그래요.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허구죠. 나는 그것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그 불협화음이 지긋지긋해요.”

그는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혹시 정보부나 보안대 등의 끄나풀은 없나 해서다.

“한 나라가 이념의 다름으로 민족이 두 쪽 나 죽기 살기로 싸우고 또 경제적 차이로 양분되어 부자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저주하고 있어요. 남자는 여자를 경멸하고 여자는 남자를 저주하고 있잖아요? 서로 다른 양쪽이 경멸하고 저주하고 심지어 죽이고 있잖아요? 이런 세상이 뭐가 재미가 있다는 거요?"

다소 화가 난 듯 태원은 반문했다. 그리고 계속했다.

"같은 보병이라도 그래요. 전방 군인들은 딴 생각할 겨를 없이 물자도 모자라고 심지어 밥과 군복이 부족하면서도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희생하면서 살고 있어요. 여기서는 모든 게 풍부하면서도 그것도 모자라 더 모으고 더 빼앗고 악쓰고 을러대더군요. 이런 게 어떻게 재미난단 말이오?"

말을 마치자 유 소위가 이어받았다.

“저의 고향이 지리산 아래가 되어 그런지 우리 동네는 빨갱이 출신들이 많아요. 우리 친척 중에도 골수 빨갱이가 많이 있었어요. 그중 한 분은 고려대학까지 나온 분인데 결국 그이의 사상 때문에 죽다가 살아난 뒤로는 아무 빛을 못 보고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가난하게 살아요. 저는 그분을 존경해요. 그분을 만나면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니까요. 그분과 사상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나쁜 놈이라고 죽이려고 하지만 막상 그런 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살을 맞대보면 무척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어요. 전 그래서 이질적인 인간일지라도 감정을 터놓고 마음의 대화를 하노라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럴 때 보면 유 소위는 저 사람이 여자인가, 정말 간호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었다.

"저는 실장님이 다 좋은데 그런 점이 싫어요. 자신이 경험한 일부를 가지고 마치 전부를 안다는 투의 사고방식 말이에요.”

태원은 여자에게서 이런 직접적인 지적을 받아본 적이 없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아니 전 같았으면 태원의 불같은 성격상 크게 다투거나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앉아 있었다. 참는 게 아니라 어쩐지 ‘그녀의 말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그만큼 관심을 갖고 관찰하고 있던 유 소위가 고맙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리라.

"서로 다르면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무어라 생각하세요?"

유 소위가 묻자 그는 당황하고 멈칫했다.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대화라고.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건 사랑이 없어서일 거예요. 사랑은 양쪽의 다른 간격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실장님은 제가 보기에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요."

그녀가 태원에게서 받은 느낌을 대신 이야기했다.

‘아니 사랑을 할 줄 모른다니....... 난 연애결혼을 했고 또 이렇게 유 소 위를 만나고 있는데도.’

태원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참고 또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마치 그 말을 듣기나 한 듯 말을 이었다.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실장님은 사랑으로 이글거리는 활화산 같은 남자예요. 그래서 불같은 사랑, 멋있는 사랑을 할 수 있을 분이에요. 하지만 안 돼요. 실장님의 사고나 감정은 일방적이에요. 자기가 남을 사랑한다면 그 상대방도 사랑하고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요. 아니 당연히 사랑을 해야 한다고 착각하지요."

이 소리를 듣자 태원의 머릿속이 갑자기 무엇에 부딪힌 듯 띵해졌다. 별로 만난 시간도 길지 않건만 자신의 무의식까지 들여다본 듯 이야기했다.

“제가 보기엔 아무리 나쁘거나 못난 사람이라도 다 나름대로의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실장님은 남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결과만 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기능과 능력만 보는 것 같아요. 그 평가에서 모자라면 실장님은 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거예요. 인간의 가치가 그런 식으로만 평가되고 계산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태원은 여유를 찾기 위해 겨우 한마디 했다.

“유 소위, 대단해요. 내가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나 자신이 그렇게 남들에게 비친다니 솔직히 좀 억울한 생각도 드네요. 나는 민주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학교 다닐 때도 그런 생각에서 박정희한테 대들었고 전방에서도 그런 생각에서 사병들과 교감을 나누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소. 군단에 와서도 난 항상 ‘사병의 군의관’임을 외치고 다녔어요. 나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어요.”

태원이 확신에 차서 말하자 그녀는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장님, 제가 괜한 소리를 했나요? 저는 실장님의 모든 것을 다 좋아해요. 순수함과 정의감과 성실성, 그리고 현명함을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러나 단 하나지만 큰 단점으로 그런 것이 있다고.”

이어서 그녀는 말했다.

“에이, 실장님한테는 무슨 말을 못하겠어. 거봐요. 조금만 싫은 이야기를 듣고도 저렇게 발끈한다니까.”

말을 마치고 그녀가 깔깔 웃었다. 눈이 큰 그녀가 크게 웃으니 실눈처럼 작아지고 얇은 입술이 커지자 너무 귀엽고 당장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 그 포옹하고 싶은 생각은 그녀의 모습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태원은 그녀의 말투나 지적에서 엄마 같은 따뜻한 가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실장님, 주제넘는 소리인데요."

그녀가 웃으며 쳐다봤다. 태원은 계속 말하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세요.”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랑할까요?"

"그건 실장님이 스스로 아셔야 해요. 하지만 부탁할 게요. 집착하지 마세요. 가지려 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법. 그 말은 그 후로 오랫동안 태원의 가슴에 숙제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