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창]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인문의 창]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1.15 14:27
  • 댓글 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0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추모비 앞에 다가섰다. 순간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브란트가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후, 비에 젖은 추모비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전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라며 브란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빌리브란트는 12월 7일 아침 보슬보슬 비가내린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2차 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 40만명을 추모하는 기념비 앞에서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이 광경을 너무나 뜻밖으로 접하게 됐던 폴란드인들 또한 역시 뜨거울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이 일로 빌리 브란트는 타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빌리브란트는 12월 7일 아침 보슬보슬 비가내린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2차 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 40만명을 추모하는 기념비 앞에서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이 광경을 너무나 뜻밖으로 접하게 됐던 폴란드인들 또한 역시 뜨거울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일로 빌리 브란트는 타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뮌헨근교에 있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다하우’(Dachau)를 몇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박물관 입장료는 대부분 유료(有料)로 운영되는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이 박물관은 입장료가 없다. 무료(無料)의 깊은 뜻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공짜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언제나 좋은 것 같다.

뮌헨시내에서 교외선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한번 환승하면 되니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다. 승용차론 시내에서 40분 정도 소요된다. 나치의 군수품공장 대지위에 이 수용소가 1933년 3월에 건립되어 1945년 4월까지 존속되었으니, 나치(Nazi)의 집권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입구에 들어서자 음울한 과거를 그대로 투영하듯,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스산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17만 평방미터의 수용소에는 2채의 단층 건물과 60여 채의 수용소건물이 아직도 그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수용소에 하나뿐인 아치형 철조 구조물로 된 출입문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방문자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 문구를 다른 말로 돌려서 말한다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혹은 ‘당신의 존재는 일하는데 있다’라는 뜻이라니 오싹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Veritas Vos Liberabit)라는 요한복음 8장의 문구에서 패러디한 것으로도 보이나, 어쨌든 섬뜩한 문구다.

수용소 입구 오른쪽 벽면에는 2차 대전 이후에 독일인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독일인들이 스스로 반성을 다짐이라도 하듯, ‘nie wieder (=never again, 결코 다시는 없다)’이라는 글귀가 5개 언어로 건물 벽면에 종행으로 나란히 각인되어 있어, 한국인인 나에게조차 불현듯 경건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 짧은 반성의 글은 신채호의 글귀와 닮아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고 설파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주니 저절로 숙연해질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2017학년부터 우리나라 수능시험에 국사과목이 필수로 지정되는 것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사실 다하우는 독일인 의사와 과학자들로 하여금,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하기 위해 세워진 악명 높은 수용소다. 그들은 주로 유대인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대기압의 급격한 증감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과, 온혈동물(인간)을 냉동했을 때 인체에 미치는 영향, 죄수들을 말라리아에 감염시킨 뒤 여러 치료 약제를 통한 실험, 또 바닷물을 마시거나, 물을 먹지 않는 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이 ‘인간’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인체실험은 누가 뭐래도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비인도적 만행이다. 이곳에는 유대인과 동성애자, 집시, 전쟁포로, 장애인 등 20만여 명이 강제로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중 약 4만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수용소 출신 과학자와 의사들은 독일의 ‘뉘른베르크의 전범의사재판’(Doctors' Trial)을 통해서, 그 가운데서도 죄질이 나쁜 독일인 의사 7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뉘른베르크 의사전범재판'은 피험자의 동의 없이 전쟁포로 및 점령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의학실험을 자행한 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재판이다. 실험의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모살, 잔학, 잔인, 고문, 참혹, 비인간적 행위들을 저질렀다. 또한 안락사 계획의 일환으로 전쟁포로 및 점령국의 민간인에게 노령, 광기, 불치병, 기형 등의 핑계를 내세워 독가스, 주사약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으로 요양원, 병원, 정신병동에서 그들을 상대로 한 대량살인을 계획하고 수행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이 사진은 1946년 10월 25일 의사전범 재판광경이다. '뉘른베르크 의사전범재판'은 피험자의 동의 없이 전쟁포로 및 점령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의학실험을 자행한 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재판이다. 실험의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모살, 잔학, 잔인, 고문, 참혹, 비인간적 행위들을 저질렀다. 출처: 위키백과

 

이런 사실을 책자와 영상자료를 통해서 이곳을 찾는 모든 방문자에 제공하고 있으니 살아있는 역사교과서가 따로 없는 듯하다. 영상자료를 통해, 뼈만 남은 죄수들을 참혹하게 다루는 나치의 만행을 눈앞에서 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곳과 더불어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는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다. 물론 아우슈비츠는 규모면에서 다하우를 능가하는 큰 규모의 수용소다. 2차 대전 이후에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다룬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아래에서 보자.

『밤과 안개』, 『제로지대(Kapo)』, 『컴 앤 씨』, 『쇼아』,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사울의 아들』등의 영화 뿐 아니라, 아우슈비츠가 영화 속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영화 『안네의 일기』, 『소피의 선택』, 『생명의 기차』, 『피아니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우먼 인 골드』등등 수백 편에 달한다. 심지어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이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같은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도 이곳을 다루고 있다.

아우슈비츠를 생각하면,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근엄한 모습이 또렷이 내 눈 앞에 그려진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1913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소식이 끊겨져 어머니 손에 의해서 성장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고 만다. 분단된 조국을 보며 가슴 아파했던 브란트는 서독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독일 통일의 꿈을 굳게 다짐한다.

1969년 드디어 서독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이웃 나라인 폴란드를 방문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주변 국가들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도 그럴 것이 2차 대전 중에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수백만 명이 죽었기에, 여전히 독일은 증오의 대상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폴란드는 나치에 의해 전체인구의 20%가 죽음을 당한 만큼 독일총리에 대한 증오도 상당했다.

1970년 12월 어느 추운 겨울,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추모비 앞에 다가섰다. 그날은 아침부터 겨울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빌리 브란트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그 앞에 섰다. 순간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브란트가 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후, 비에 젖은 추모비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오히려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고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왔으며, 자신의 조국에 그 어떤 빚을 지지도 않았으며 사과할 필요도 없었던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서양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을 뜻한다. 우리로 치면 일본 총리가 동작동 국립묘지 무명용사 추모비 앞에 엎드려 큰절을 한 셈이다.

브란트의 행동은 나치의 과거를 뉘우치며 반성하고 진정한 용서를 청하는 사죄 그 자체였다. 추모비 앞에 헌화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그의 역사관에 따른 행동이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 작은 행동이 독일 현대사를 바꾼 계기가 되었다. 세계는 독일을 용서했고 독일은 다시 인류공동체 안에 일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당시 ‘나는 독일보다 독일 총리를 더 신뢰 한다’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정치가요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행동에 감동한 폴란드 국민들은 독일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서서히 씻기기 시작했다. 전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라며 브란트의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독일과 일본은 모두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지만 전쟁이 끝난 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소인배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이웃인 것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지금 현재까지도 독일에서는 독일인 나치전범들의 추적이 계속되고 있는 배경에는 ‘나치범죄의 시효를 폐지하고 영구히 추궁한다.’는 1979년 독일의회의 결의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반인도적 범죄는 시효가 없다는 말이다.

구서독에서는 연합군이 주축이 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뿐 아니라 독일의 자국 재판소를 통해 지금까지 9만 명이 넘는 나치 전범 관계자를 재판에 회부하고, 7천 건에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1985년 5월 8일,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은 연설에서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맡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됩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라는, 타자(他者)에 의한 판결 말고 그들 스스로에 대한 재판판결을 내린 적이 여태껏 없었다. 일본은 아직도 ‘가해(加害)의 논리’를 망각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의식’에 빠져있다. ‘왜 할아버지 세대의 죄를 손자 세대가 떠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 의문을 갖는 일본인들의 사고가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라고 말한 신채호의 말을 들려주고 싶을 뿐이다.

독일은 잘못을 반성하고 이웃나라와 화해를 함으로써 밝은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진심어린 사과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 빌리 브란트의 결단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다하우에서 밀려오는 빌리 브란트의 깊은 울림은 독일의 반성과 일본의 부정이라는 복잡한 이중의 논리에 갇혀 답답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