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⑲달빛은 초가지붕 위에 빛나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⑲달빛은 초가지붕 위에 빛나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0.01.11 21: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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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의 꿈을 현실인양 새 쫓는 흉내를 내며
오곡밥 지어 먹던 정월대보름

설날 분위기를 마무리하는 정월대보름은 아침 일찍 일어난 농부 아내의 고두박(조롱박) 딱딱 새박 딱딱 후여!” 소리와 함께 밝았다. 대나무 마당비를 들고 채전 싸리 울타리를 두드리는 새 쫓는 흉내였다. 물결치는 황금들판과 이 때를 놓칠세라 날아드는 참새 떼는 다가올 풍년의 환상이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풍년을 행동으로 보여줄 방법이 없어서 궁리한 끝에 나온 조상들의 지혜였다. 꿈을 현실인양 빗자루를 휘둘러대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새치름한 공기 속에 남루를 서럽게 펄럭였다.

그리고 가마솥에 오곡밥을 안쳤다. 오곡(五穀)은 대표 곡식인 쌀, 보리, , , 기장을 꼽기도 했으나 정월대보름 음식으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찹쌀, 차수수, 차좁쌀, 붉은팥, 검정콩의 찰곡식이 일반적이었다. 찹쌀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해 먹고, 성씨가 다른 세 가정의 밥을 먹어야 한 해 운이 좋다하여 이 집 저 집 돌아다녔다. 아이들 손에는 섣달그믐밤 신발 훔치러 온 도깨비 막으려고 처마에 걸어놓았던 체가 들려 있었다.

1990년 설날 즈음 마을 동쪽의 양동산을 배경으로. 정재용 기자
1990년 설날 즈음 마을 동쪽의 양동산을 배경으로. 정재용 기자

오곡백과(五穀百果) 풍성한 가을은 농부에게 염원이었다. 농사가 시작되는 정초에 오곡밥을 지어 하늘과 조상께 풍년을 비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매월 보름이 있지만 명절은 풍년을 소망하는 정월과 그 바람이 헛되지 않게 온갖 곡식과 과일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팔월은 대보름으로 지켰다.

마을 입구에 팽나무, 느티나무 등의 고목이 있거나 뒷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으면 수호신으로 여겨 나무에 금줄을 새로 두르고 당산제(堂山祭)를 지냈다. 소평마을은 조성된 지가 100여년밖에 안 된데다 평야지대로 당산제는 없고 큰거랑에 가서 용왕한테 비는 이가 더러 있었다.

정월대보름의 주인공은 보름달이었다. 아이들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일찌감치 양동산으로 청년들을 따라 달 보러 나섰다. 갱빈(기계천변) 물을 건너 양동산에 올라 생 소깝(솔가지)으로 불을 피웠다. 어래산, 무릉산, 도덕산 여기저기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 위는 순식간에 안계마을, 양동마을에서 올라 온 사람들까지 북적였다. 이윽고 교교(皎皎)한 정성덩이 얼굴을 내밀면 와아함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터지고, 아주머니는 합장해서 연신 절을 하고, 청춘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아이들은 붙잡을 놀이를 하고, 따라온 개들은 아이를 쫓아다니고 한동안 모두가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산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마을에서 가족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했다. 빨래터 아래 물 깊은 큰거랑 둑에서는 이때를 맞춰 푸닥거리, 굿이 벌어지기도 했다. 달집태우기 행사는 당시에 아무 데도 안 했다.

아이들은 이때를 위해 미리 만들어놓은 불매통(불통)을 들고 나가 쥐불놀이를 했다. 빈 페인트 통 곳곳에 송곳과 망치로 구멍을 뚫고 철사 줄로 긴 끈을 단 것으로, 여기에 마른 나무를 쪼개 넣고 불을 붙인 후 빙빙 돌리면 불꽃이 일었다. 마을 주위가 온통 도랑둑이고 논둑이라 불지를 곳은 천지였다. 불놀이가 싱거워지면 하나, , 셋 구령과 함께 일제히 불매통을 하늘로 던져 올려 불꽃쇼를 벌였다.

가끔 황새마을 아이들이 소평마을까지 내려 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달밤에 난데없는 돌팔매질 전쟁이 전개됐다. 논바닥에 돌 찾기는 어려워서 논둑에 박힌 돌을 빼내고 깨서 던졌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더 몰려들자 황새마을 아이들은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다행히 팔 힘이 약하고 멀리 떨어져서 던지다보니 크게 다친 아이는 없었다.

어느 해는 마을 전체가 줄다리기를 했다. 맹포댁에서 앞실댁에 이르는 마을 복판 길을 기준으로 앞 각단 뒤 각단으로 갈랐다. 집집마다 추렴한 짚으로 줄을 삼아(만들어) 대보름 달빛 아래서 줄다리기 시합을 벌였다. 굵고 긴 황룡 같은 줄 좌우로 사람이 늘어서다보니 좁은 골목이 꽉 찼다. 곁줄을 잡고 앉아 있는 양 팀 가운데서 징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일어서서 줄을 당겼다. “영차, 영차소리가 골목이 떠나갈 듯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휘영청 밝은 달은 떨리는 입술, 시뻘건 얼굴을 비췄다.

맹동어른(황수관 박사의 아버지 택호)은 앞 각단 응원대장으로서 웃옷을 벗어 흔들며 힘낼 것을 독려했다. 한판 끝나면 진영을 바꿔서 하고, 승패가 안 나서 세 판까지 하고 나면 전원 기진맥진이었다. 찬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무 말도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너털웃음만 지었다. 줄은 각 가정이 조금씩 잘라가서 지붕 위에 던져 올려놓았다. 이어서 풍물놀이와 함께 술잔치가 벌어졌다. 경비는 낮에 풍물패가 지신밟기해서 번 돈으로 충당했다. 덕분에 사흘간은 숟가락 들기도 힘들었다.

줄다리기가 열렸던 마을 안길. 정재용 기자
줄다리기 시합을 벌였던 마을 안길. 정재용 기자

지신밟기는 마을을 돌며 가가호호 신주(神主)단지가 있는 안방을 향해 성주신, 부엌의 조왕신, 장독신, 우물신, 변소의 정낭신, 외양간신 등을 달래고 복을 비는 민속놀이였는데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 그냥 돈을 냈다. 상쇠는 교회 옆집의 이종학 씨였다.

팔월대보름과 달리 정월대보름은 명절 성격이 옅어지면서 피부병 안 걸리게 견과류를 먹는 부럼 깨기’, 귀를 밝게 한다며 마시던 귀밝이술은 추억이 되고 농촌인구가 급감하면서 쥐불놀이도 자취를 감췄다.

농한기는 결혼을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는 학교 선생님들도 수업에 지장이 없도록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결혼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설 쇠러 다니면서 집안의 결혼 소식을 알리다보니 잔치는 정월대보름에 꼬리를 물었고 거기다 초상까지 나는 날이면 사흘이 멀다 하고 큰일(大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