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2)
녹슨 철모 (42)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1.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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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은 이따금 유선영 소위에게 편지를 썼다. 유 소위는 아직 신참 간호장교가 되어 3교대 근무를 하였다. 태원이 후송병원을 방문하여도 그녀의 근무시간과 맞지 않아 못 만나고 올 때가 많았다. 일부러 응급실 볼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찾아가 벽에 붙은 그녀의 근무표를 슬쩍 보고 오기도 하였지만 그게 매번 쉽지는 않았다. 만나서 하는 말과 글로 쓰는 말은 따로 있는 듯하였다. 그녀의 근무시간도 알 겸 또 글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편지를 썼다.

 

“유 소위님께 그간 안녕하세요?

가끔 만나면서도 이렇게 글을 쓰자니 좀 어색한 기분이 드는군요. 어릴 때부터 여자들과 가까이 지내본 일이 없어선지, 어쩐지 여자들을 만나면 말이 제 뜻대로 잘 안 돼요. 특히 선영 씨를 만나면 저의 감정이나 생각의 표현이 더욱 잘 안 되더군요. 물론 편지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로서는 편지가 조금은 더 저의 마음을 표현하기 쉬울 것 같아 이렇게 한 번 써봅니다. 제가 선영씨에게 갖는 이 감정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제가 이렇게 만나자고 해도 되는 걸까요? 우린 의사와 간호사로, 또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군인으로, 우리의 만남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 저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선영씨와 만날 때의 감정이 처음과는 다른 변화가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만나고 나면 더 보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선영 씨가 다른 군의관과 이야기만 해도 화가 납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요. 더구나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도 각자의 입장 탓에 그것이 축복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추악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선영씨의 마음부터 알고 싶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부담이 되지나 않는지, 선영씨가 다만 저의 억지 마음을 가라앉혀 주기 위해 만나주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의 염려가 생기는군요.

제가 오늘 편지를 쓰는 이유는 첫째는 저의 감정 변화를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선영씨의 마음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가 무안해 할까 봐 거절하지 못하고 만나신다면 저는 지금부터 단호하게 저의 감정을 억제하겠습니다. 먼 훗날 더 이상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그런 시기가 되기 전에 저는 저의 마음을 미리 다져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편지를 해놓고 무슨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핀잔 들을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저의 속내를 확실하게 털어놔야 마음이 편할 수 있고 또 선영 씨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어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답장을 해주세요. 말하고 나니 좀 쑥스러운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속은 후련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글을 마칩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실 태원은 이번 편지에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것은 유 소위에 대한 자신의 감정 표현이었는데 그것을 호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모자라는 느낌이고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표현이 그의 도덕관 때문에 억제되는 것인지 또는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린 다음에 할 소리인지 또는 아직 사랑이 거기까지는 성숙하지 않았는지 자신도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란 말은 참았다.

사실 태원은 의학을 배운 과학도여서 그런지, 아니면 그의 개인적 속성 탓인지 늘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때 대개 기승전결의 순서로 나타내야 직성이 풀렸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비유법이나 변죽을 울리는 수법 또는 다른 상황을 설정하여 상대가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대로, 느끼는 대로, 순서대로 전부 표현했다. 그러다 보면 아직 시기가 이른 탓에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때로는 억센 표현이 되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여 일을 망치기도 하였다. 또 어떤 때는 상대방의 의사를 듣고 싶어 억지로 그 의사를 표현하게 하려다 기분을 상하게 해 일을 꼬이게 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자신이 호감을 가지면 상대방도 당연히 그러리라 착각하여 행동하다가 일을 그르친 적도 많았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일이 잘 안 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태원은 이번 편지에도 그의 진심을 쓰지 못하고 만 것이다.

 

“우 실장님께 지금은 밤이에요. 오늘은 이상하게 응급후송이 없네요. 이런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전방에서 다쳐서 오는 사병들을 보면 그들의 상처의 깊이보다 제 가슴이 더 깊게 파여요. 그런 환자를 볼 때면 전 가끔 생각해본답니다. 실장님이 전방 생활하실 때 이런 환자를 많이 보았을 텐데 그때 심정이 지금의 저와 같았을까 하고 말이에요. 우리 둘의 감정이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아 질문해보았어요.

실장님, 이름을 한번 불러도 돼요? 태원 씨라고. 저는 태원 씨를 만난 이후 즐겁게 산답니다. 왜냐면요. 첫째는 한쪽을 속이는 즐거움, 둘째는 저의 자아를 찾아가는 즐거움, 셋째는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즐거움 그리고 마지막에는 언젠가 멋진 연애소설을 써보겠다는 즐거움 때문이죠.

태원 씨는 괜스레 심각하고 괜한 걱정을 많이 해요. 제가 보기에 태원 씨는 신념의 사나이로 보이는데 막상 여자에게는 그런 게 잘 안 되나 보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세요. 전 태원 씨의 행동을 따를게요. 세상에 좋은 일, 나쁜 일이 따로 있나요? 그건 일을 만드는 사람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닐까요? 설사 나쁜 일이라도 우리가 좋은 일로 만들면 되잖아요. 오는 화요일 제가 밤번이에요. 그날 낮에 금촌 강 다방으로 나갈게요. 그럼 그때까지 안녕.”

 

그녀의 길지 않은 편지를 읽었다. 그녀의 뜻을 알 듯 말 듯하였다. 태원은 글 사이에 혹시나 끼어 있을지도 모를 다른 숨은 뜻을 찾아볼 생각으로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전에도 그랬다. 나름대로는 숨은 뜻이라고 어렵게 찾아낸 것도 막상 정작 본인을 만나서 확인해보면 아무 뜻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쪽을 속이는 즐거움’이라는 말은 그녀가 남편을 속이는 즐거움이라는 말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석해도 될까? 그 사람이 둘의 만남을 알고 추궁하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며 속이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남편이야 알든 말든 관계없이 이렇게 외간 남자를 몰래 만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남편을 속이는 행위라는 뜻일까? 양자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 용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속인다는 것은 무언가 단둘이 만드는 비밀이 있다는 말로 비밀이라는 말 자체부터 태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달콤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자아의 추구, 철학의 공유 그리고 소설 쓰기 등 그 말들의 해석을 태원은 자신의 입맛대로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요’라든가 아니면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상상해봤다. 나름대로 좋게 해석하고 화요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태원은 수도통합병원장의 처방대로 군단장의 치료를 위해 주사를 놓았다. 위관급 장교가 군단장 방은 물론 근처에 갈 이유도 별로 없다. 군단장을 공식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그의 조직을 통과해야만 했다. 일단 중령인 비서실장이 있다. 여기에서 공식적인 계획표가 만들어지므로 접견도 이곳을 경유해야만 했다. 그리고 부관이 둘인데 소령이 하나 있고 대위가 하나다. 소령은 부대 안에서 손님들을 안내하고 군단장의 명령을 받고 시행했다. 그 외에 몸종처럼 부대 안팎으로 따라다니며 모든 시중을 드는 사람은 대위 부관이다.

태원이 처음 군단에 와서는 별을 단 장군들은 이미 다 같은 장관급 고급 장교들이니 그들끼리 만나면 대충 수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단장 방을 일주일 드나들면서 가만히 보니 장군들끼리의 군기가 하급 장교나 사병들보다 월등하게 세다는 것을 목격하였다. 일선 사단장들도 자신들이 별이건만 군단장 방을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하는 사람, 머리를 다시 한번 빗는 사람, 자신의 옷을 매만지는 사람 등으로 무척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전방에서 그렇게 신비하고 높아 보이던 그 사단장들이 여기 와선 이렇게 벌 벌 떠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대기실에 있는 사병들은 장군들이 들어와도 구호는 물론이거니와 거수경례도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목례 정도만 했다. 태원은 처음에 바빠서 저러는가 건방져서 저러는가 알 수 없었는데 복무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했다. 군의관은 의사이므로 진단이나 치료를 위해서는 아무리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어도 주치의로서 항상 먼저 군단장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며칠 그러고 나니 태원도 전방 장군들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사라져 가고 나중에는 존경심도 아주 낮아져 갔다. 군단장은 그의 성격상 그러는지 몰라도 태원이 경례를 해도 대꾸가 없고 주시를 다 놓고 나올 때까지 말이 없었다. 같은 장군이라도 별 하나 단 참모장은 말이 너무 많은데 비해 별 두 개인 부군단장은 말수는 적었다. 그러나 자주 태원을 불러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고 할 말은 다 하였다. 하지만 별 셋의 군단장은 말이 없었다. 장군들의 말수는 그들의 별 개수와 반비례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연한 성격 차이일까? 태원으로서는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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