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극복한 시니어] 소년가장의 12년 주경야독, 문학박사의 꿈 이뤄
[고난을 극복한 시니어] 소년가장의 12년 주경야독, 문학박사의 꿈 이뤄
  • 제행명 기자
  • 승인 2020.01.13 08: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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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 전 포스텍 교수

1·4 후퇴 때 안동서 대구로 와
잡화·화장품상 하며 생계 꾸려
오성중학교서 인생 은사 만나
중3 때 잡지·서울신문 등 입선
뇌출혈 이기고 집필·강연 왕성
'꿈은 이루어진다'는 일념으로 교수의 꿈을 이룬 김원중 전 포항공대(현 포스텍) 교수
'꿈은 이루어진다'는 일념으로 교수의 꿈을 이룬 김원중 전 포항공대(현 포스텍) 교수

 

김원중 전 포항공대(현 포스텍) 교수는 12살에 소년가장이 되어 초등학교 급사(사환)를 시작으로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2년 동안 야간학교만 다니며 주경야독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년퇴직 후 ‘대구세계문학제’ 추진위원장으로 심혈을 기울여 일하다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행사는 무산되고 아쉬움만 남았다. 3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건강을 회복해 84세의 나이에도 문학의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일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하면 된다’는 말을 눈물로, 몸으로 새기며 고난을 이겨냈다. 1·4 후퇴 때 안동에서 대구로 온 15세 김원중은 어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책임졌다. 대구시청 앞에서 잡화상을 시작했다. 교동시장과 염매시장에서 화장품 행상은 그야말로 생존전쟁이었다. 토·일요일은 물론 휴일도 쉬지 않고 주경야독의 치열한 삶을 이어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그의 인생목표를 이끌어 낸 이면에는 피보다 진한 멘토들과의 인연이 있었다.

먼저 오성중학교에서 만난 이우성 선생님을 꼽는다. 행상하다 19세 늦깎이로 찾아간 야간학교 학생에게 독서지도로 문학의 꿈을 꾸게 했다. 장학금을 주면서 오성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했다. 중3 때 잡지 ‘학원’에 ‘야학’이 입선됐고, 서울신문에는 동시·동화가 입선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상계’ 잡지를 읽으며 교수가 되어 좋은 글을 쓰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고3 때는 시집을 팔아 학자금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으로 경주에 있는 서영수와 함께 ‘별과 야학’ 시집을 함께 만들어 시인 유치환의 서문을 실어 출판했다.

영어를 배우려고 만난 미국인 하드슨 교수(경북대 교환교수)가 대학 진학의 은인이다. 가난한 그에게 장학금 혜택이 있는 영남대학교 진학을 권하고 영어도 가르쳤다.

특히 고교시절 문학을 지도하던 박양균 시인은 김 교수에게 대부와 같은 존재다. 문학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원화여고에 첫 직장을 알선했고 후일 ‘시와 의식’(문예한국) 주간을 맡게 했다.

권위주의 시대 영남대는 서울대를 졸업하지 않으면 교수로 채용하지 않았다. 그는 이효상 재단이사장을 찾아가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영남대 졸업생도 본교에 채용하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선근 총장의 배려로 영남대 졸업생으로는 처음으로 모교의 교수가 됐다. 젊은 시절 꿈이 이뤄지면서 결혼도 했다. 인생의 안정기를 맞았다. 대구한의대 교수(부총장·총장서리)와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를 거쳐 정년퇴임하였다.

그의 또 다른 은인은 며느리이다. 퇴임 후 중풍으로 쓰러져 깨어났으나 겨우 휠체어를 타고 말도 잘 못하는 환자가 됐다. 며느리는 휠체어를 버리게 하고 지팡이를 사주고 한쪽 다리를 끌면서 억지로 걷도록 했다. 처음에는 10m도 못 걷고 넘어졌다. 몇 번이나 포기하려다가 다시 걷고 걸었다. 어눌한 말을 고치기 위한 껌 씹기와 혀 운동도 몇 년 동안 하였다. 강인한 정신력은 소년가장 시절 피땀 흘린 경험 덕분이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주인공 산티아고처럼 파괴당해도 패배를 모르는 노련한 삶이 좌절을 느낄 때마다 힘이 됐다고 술회했다. 아내의 내조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기도 했다.

근래 ‘헬 조선’을 외치는 젊은 세대에게는 꿈을 키우는 용기, 독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면 반드시 길이 있다고 권면했다.

노인들에게 강연할 때 ‘누죽걸산’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을 강조하고 걷기와 웃음운동 펼친다. 84세 고령에도 왕성한 집필 활동과 대구, 포항, 구미, 부산 등의 사회평생교육원에서 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문단의 역사라 할 만한 궤적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쓴 에세이집 ‘사람을 찾습니다’에 나오는 기인(奇人)이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87년에는 매일신문에 ‘신문 배달 소년, 교수가 되다’라는 특집기사도 실렸다.

1969년 김 교수의 최초 시집 표지
1969년 김 교수의 최초 시집 표지

 

저술 활동도 왕성하게 했다. 시집으로 ‘별과 야학’외 4권, 수필집으로 ‘하늘만평 사뒀더니’ 외 6권, 대학교재 ‘현대문학의 이해’ ‘인문학적 과제와 창조적 글쓰기’ 외 기타 17권의 저서가 있다.

“내가 존경하는 철학자 러셀은 99세 로 숨지는 날 아침에도 3천 자를 썼다”는 김 교수의 말이 귓전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