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1)
녹슨 철모 (41)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1.0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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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구급차가 태원의 집에 도착하였다. 자살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군단사령부 내의 병력이 아니고 사령부 맞은 편에 있는 헌병대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현장에 가보니 헌병 병사 하나가 태권도 도복 끈으로 자신의 목을 감고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태원은 그가 달려갈 때까지 누구라도 그의 몸을 밧줄에서 끌어내어 인공호흡이라도 시키고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긴 시간 매달려 있은 탓에 목에 상처가 깊이 패어 있었고 그의 바지는 오물로 더렵혀져 있었다.

사람이란 게 참 이상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라도 죽고 나면 무서워진다. 부검 전문의들 꿈에는 그들이 해부했던 시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죽는 즉시 물건이 되므로 꿈에도 나타나지 않고 보면 무서워지는지도 모르겠다. 헌병들은 멍하게 동료의 시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결국 위생병이 죽은 사병을 끌어내려 목의 줄을 풀고 검찰관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고나 나면 의무실, 헌병대, 보안대, 감찰부, 법무부, 인사처 다섯 군데에서 관계자들이 현장에 나왔다. 속칭 ‘오부합동조사’라는 것이다. 시신 확인이 끝나자 제각기 자신의 업무로 들어갔다. 군 법무관의 현장 조사가 끝나고 위생병들과 군의관이 시신의 염을 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의 옷 중에서 가장 깨끗한 것으로 입힌 뒤 붕대로 손발을 묶어 염을 한다.

사건 처리를 마친 후 태원이 응달촌 자신의 집으로 오니 새벽 두 시였다. 태원은 전방에서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자살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자살자 처리가 그로서는 입대 후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병주가 깰까 봐 조용히 들어와 누웠는데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최전방 사병들은 거의 자살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있어도 죽을 일이 많다. 군인이라면 적의 총에 맞아 죽어야지 왜 자살을 한단 말인가? 태원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으로 복잡해져갔다. 그 사병은 왜 죽었을까? 고참들에게 학대를 받아서일까? 사회에 있는 여자친구가 배신했을까? 고독해서일까? 우울한 탓일까? 왜 자살을 하였을까? 앞의 이유 중 어느 것이라도 그것이 필수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 죽은 자가 잠깐 일어나 우리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 중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충분하고 절박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급하게 잘못 내린 판단에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잣대로 죽은 자를 쉽게 혹은 좋게 혹은 나쁘게 감히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돌아오는 논둑길에는 빗줄기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막 잠이 들려 하는데, 또 마당에서 군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위생병이 나타났다. 자살자가 또 생겼다는 것이다. 하룻밤에 두 명이다. 첫 신고식 치고는 좀 호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사령부 병력은 아니고 딴 부대 병참부대 사병이었다. 현장에 가보니 지프에 그 사병을 앉혀 놓고 있는데 아마도 응급후송하려던 모양이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가 붉은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그 사병은 이미 죽어 있었다. 시신을 내려 땅바닥에 뉘어 늘고 전신을 훑어보았다. 칼빈 총의 방아쇠를 그의 발가락에 걸고 총구는 자신의 턱 아래에 대고 총을 쏘았다. 턱 밑 상처는 총알구멍밖에 없었지만 총알이 차고 나간 머리 꼭대기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시신은 아직 따뜻하였고 피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생병들은 이런 경험을 자주 했기에 노련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태원을 쳐다봤다. 그런 동작의 의미를 태원은 안다. 총알이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의 구멍을 솜과 붕대로 막아야 하는데 엄청난 양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재료를 아껴 적당히 할까요?’ 묻는 것이다. 태원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산 사람에게 쓸 붕대와 거즈도 모자라 절절 매는 의무대에서는 정말 속 쓰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어찌 그리 야박하게 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전우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우정이란 부족한 자료를 그에게 듬뿍 주는 것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며 솜과 붕대로 총상 부위를 막게 했다.

시신 처리를 마치고 구급차에서 내려 논둑길을 걸어가는데 비바람이 거세게 소리치며 몰아쳤다. 마치 죽은 병사들의 절규나 통곡처럼 들렸다. 여명이 되니 희미하게 나무가 보이는데 수양버들이 미친 듯이 그 나뭇가지를 귀신처럼 늘어뜨리고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어느덧 신 새벽이 온 모양이다. 시골 교회의 종소리가 울렸다. 귀신이 나올 때는 그 종소리가 퇴마의 소리로 들려야 제격인데 그날의 종소리는 오히려 악마들의 축제 소리처럼 들렸다.

병주는 조용히 자는 듯하였다. 그 후에도 그녀는 그날 밤 왜 두 번이나 남편이 밤중에 부대로 불려갔는지 묻지 않았다. 태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무슨 해명 비슷하게라도 말을 하려다가 안 그래도 시골 생활이 힘들어 보이는데 그런 이야기는 그녀에게 하나도 덕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근하였다.

병주는 태원을 출근시키고 나서 다시 우물가로 갔다. 태원이 퍼준 물로는 하루 쓰기가 모자랐기 때문에 그녀는 한 동이의 물을 더 퍼두어야 했다. 이런 사실을 태원은 그의 시골 생활이 다 끝나고도 알지 못하였다. 그녀가 그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거운 몸으로 우물물을 긷노라면 이따금은 주인댁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마음에 거들어주곤 하였다. 이 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빨래는 뒷동산 아래로 흐르는 실개천에서 하는데 이 물도 어린애 오줌 줄기 정도로 흘러내려서 무척 천천히 빨래를 빨 수밖에 없었다.

사령부 장교들이 건너편 군인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는데 그녀는 답답하였다. 왜 군의관이 그 아파트에 못 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에 태원의 고집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조금만 굽히고 들어가면 될 것을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나 굽히는 것을 패배로 알고 그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런 성격 때문에 고생을 하였지만 이제 사는 방법이 다른 그녀도 더불어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때로는 가슴이 답답하였다. 신념이 있거나 의지가 강한 남자가 멋은 있어 보이지만 그들의 가족은 덤으로 고생을 하고 사는 것이다.

병주는 자신이 시골 여자, 군인 가족으로 서서히 초라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느꼈다. 결혼 전에는 개울가의 빨래는 시골 아낙네나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어느새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변했고 방에 들어가 봐야 변변한 세간살이 하나 없는 썰렁한 분위기, 벽 한 켠에 서 있는 비키니 옷장, 배는 점점 불러오고 얼굴의 부기로 예전 그녀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시댁에서는 시집살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어도 분위기가 그녀의 친정과 너무 다른 탓에 그녀는 시댁의 풍습과 사고에 굉장한 이질감과 함께 충격을 받았다. 마침내 그녀 자신도 그런 사람들과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태원 생각에 모든 시름과 걱정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와의 달콤한 재회를 상상하며 말없이 고통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된 신혼생활은 그녀를 너무 당혹하게 만들었다.

태원은 어쩌면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보람있게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지만 병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았다. 가령 응급환자가 생기거나 비상이 걸려 갑자기 구급차가 와서 달려나가더라도 어디를 간다든지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퇴근 시간도 왔다 갔다 일정하지 않았다. 이런 그를 그녀는 굳이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설사 말을 해봐야 나름대로의 이유를 내세우며 자신을 너무 모른다고 타박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도 그녀를 침묵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부부의 생활이 다 이런지 아니면 자기네 부부만 그런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신혼은 꿀맛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