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40)
녹슨 철모 (40)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12.3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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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대장님, 저도 개인 화기로 권총을 주십시오.”

태원이 본부 대장 김 중령에게 건의하였다.

군단 의무대는 본 부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김 중령은 바로 태원의 직속 상급자이다. 태원의 업무는 종류에 따라 다른 지휘 계통을 밟는 이상한 체제였다. 즉 의무행정에 관한 것은 인사참모부의 지시를 받고 의무 물품에 대해서는 군수참모부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상적 업무는 본부대 지시를 따른다. 본 부대의 지휘자는 참모장인 박 준장이다. 태원은 어떤 때는 참모장, 어떤 때는 인사, 군수 참모의 지시를 받는가 하면 일일 회의나 회식은 본부대에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전병원은 군단 소속 병원이지만 독립된 부대로 취급되어 병원장 권 중령은 주요 회의 때는 군단회의에 참석하지만 업무는 독자적인 행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복잡하게 많은 상급자를 모시고 있지만 막상 일이 생기면 그를 보호해줄 상관은 전혀 없었다.

“실장, 그러면 지금 자네 개인 화기는 뭔데?" 

본부 대장이 물었다.

"칼빈이지요. 훈련 때는 물론이고 매주 수요일 하기식 행사 때 저 혼자 긴 총 메고 서 있으니 다른 장,사병들 보기에도 창피합니다.” 

태원이 창피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 웃었다.

"아, 그건 간단해. 다음 행사 때부터 자네가 마분지에 권총을 그려 그걸 오려 차고 나오면 돼.” 

진지하게 건의했는데도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원래 위관들 개인 화기가 그거잖아? 그러니까 권총 차고 싶으면 계급을 영관급으로 올리면 되잖아? 장기 신청해, 장기복무 신청해서 계급을 올리면 다 해결되는 거지 뭐.” 

덧붙여서 그는 시답잖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보통 심지가 약한 사람은 사람들은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태원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본부 대장님, 육군 규정 말씀하시는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런 규정이 융통성 있게 운영이 되어야지요. 전방에서 전차병은 병이라도 권총을 차지 않습니까? 그들이 좁은 전차 속에서 근무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법무부의 법무장교들도 위관이면서 권총을 지급받고 있지 않습니까? 환자를 보는 군의관에게는 북괴군이 총을 안 씁니까? 그렇다고 긴 총을 메고 환자를 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병원 군의관들은 위관이라도 권총을 착용하는 것 아닙니까?" 

태원은 본부 대장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병원이든 부대이든 군의관의 하는 일은 동일한 것 아닙니까?"

태원이 딴은 평소에 느낀 점을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풀어가며 이야기를 끝냈다.

“야, 인마 너 잘 빠졌다. 그래, 너 똑똑하다. 네가 군단장까지 다 해 먹어.” 

본부 대장은 이론에 달리니까 화가 나서 손으로 그의 책상을 내리쳤다.

태원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 전방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였어도 사병은 물론이요, 딴 보병 장교들까지 그를 좋아했고 대대장은 항상 사단장 표창 감이라고 칭찬을 했는데 여기는 대한민국 군대가 아닌가? 왜 사고방식이 이처럼 다른 것인가? 이곳이 만약 대학이었다면 그리고 저 사람이 교수였다면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전투 부대 군인이 된 그로서는 참고 있을 따름이다. 태원의 그런 무례한 행동을 옆에서 보고 있던 장교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하지만 며칠 뒤 태원에게도 권총이 지급되었다. 본 부대 내의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군의관 하나 대찬 놈 왔다.’고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태원은 박정희 군사독재를 저주하였다. 하지만 군인은 미워하지 않았다. 특히 하급 부대인 전방대대에서 보병들과 근무하면서는 그들끼리 교환되는 우정과 희생을 보고 더욱 더 군인에 대한 애착과 애정이 깊어졌다. 하지만 상급부대인 군단에 와보니 그의 감정과 생각이 달라졌다. 같은 군인인데도 그들이 근무하는 장소에 따라 이토록 달라지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군단의 고위층 군인 대다수가 민간인의 단점을 닮아 있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민사 참모가 뛰어왔다. 갑자기 자기 차를 타고 전방으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왜 또 북괴 게릴라가 나타나서 응급환자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법은 없었다.

"참모님, 갑자기 웬 일이십니까?" 

태원이 물었다.

“의무실장, 내가 평소부터 몸이 허약한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 

민사 참모가 몸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도 아닌데 그는 항상 그런 생각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의 속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겉모습은 권위가 없어 보이고 경박하게 보였다. 사람의 외모는 자신의 인간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인데 본인은 그게 자신이 몸이 말라서, 즉 허약한 몸매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었다.

"전방 철책선 부대장 중에 내 후배가 있거든. 그 친구한테 부탁해 두었는데 방금 연락이 왔어.”

그게 무슨 말인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계속 들었다.

“오늘 그 친구가 노루 한 마리를 생포했다는 거야. 이놈의 피를 산 채로 마시면 내가 좀 살 것 같아. 그러니까 실장이 좀 협조해줘.”

그가 간사하게 웃으며 부탁했다. 여기서 또 태원은 참았다. 하는 수 없이 선임하사에게 협조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응급환자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퇴근하였다. 다음날 선임하사가 전방에 갔던 이야기를 보고하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그들은 잡은 노루의 생피를 마시기 위해 산 채로 두고 피를 마셔야 된다고 생각하여 노루의 목 핏줄에 정맥용 주삿바늘을 꽂은 뒤 군수 참모가 주삿바늘을 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건 마치 영화 '드라큐라' 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몇 모금 피가 빨려 나오다 이내 막히고 말았다고 한다. 주삿바늘이 가는 데다 공기가 섞이니 피가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노루는 아프고 무서워 발버둥을 치고 육군 대령 계급장을 단 바싹 마른 한 사나이가 노루 목에 매달려 피를 빨고 있는 광경을 생각하니 웃음과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북괴를 잡아야 할 군인이 노루를 잡고, 또 군단에서 그 피를 마시러 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불러왔다.

얼마 전 군단 경비 중대 입구에 연못이 만들어졌다. 아무리 총 들고 싸우는 군인이라도 메마른 정서를 갖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며 참모장이 조그마한 도서관을 하나 만들었다. 말이 도서관이지 사실은 책 몇 권 갖다 놓은 독서실이었다. 이런 정도라도 참모장 자신으로서는 큰일을 하나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도서관 앞에 연못을 팠다. 별 것 아니었지만 참모장 자신도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을 군단장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도서관 개소식을 하였다. 테이프를 자른 뒤 도서관은 아무것도 볼 것이 없으니 군단장은 참모들과 새로 만든 연못의 흙탕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때 군수 참모가 한 말씀을 올렸다.

“군단장님, 저 연못 속 금잉어가 참 아름답죠?"

이 말을 들은 군단장과 참모들은 정말 그 속에 빨간 금잉어가 있는 줄 알고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흙탕물이니 뭐가 있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놓고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말하지 못했다. 혹시 금잉어가 있는데 자신만 보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러나 역시 군단장은 달랐다. 그는 쓰다 달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흘끗 연못을 한 번 더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떠버렸다. 그가 계속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장,사병들은 군단장의 지능지수를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고 전혀 쳐다보지도 않았다면 그는 옹졸한 지휘관이 될 뻔하였다. 태원은 이를 보고 '역시 별 세 개는 달 만한 사람이 다는구나' 하고 느꼈다. 군수 참모의 이날 발언은 그 후로도 두고두고 그를 평가할 때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