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의 '옛 노트에서'
장석남의 '옛 노트에서'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2.27 17:06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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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의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1995. 04. 28.

 

2019년, 기해년과의 작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호사가들은 ‘황금돼지해’라는 의미를 부여하며 떠들썩한 기대감을 선사했었지요. 돼지띠인 저는 그에 부응하듯이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제 곳간이 얼마나 채워졌나, 조용히 점검할 시점입니다. 물질적인 곳간이 아니라 인연의 곳간, 영혼의 곳간을 살핍니다. ‘시니어기자’란 직함 덕분에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얻은 것이 많습니다. 다양한 인연을 만났고 기존의 인연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를 발굴하여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세속을 초탈하지 않고서야 나이 한 살 더 먹는 일을 대수롭지 않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올해 저는 마음의 노트에 새겨둘 이름이 많아 기쁘게 먹을 수 있겠습니다.

그럼 시의 속살을 더듬어 볼까요. ‘옛 노트’라는 원관념에 품, 빛, 풀밭, 개울, 앵두, 모서리 등의 시어들이 보조관념으로 세계를 확대해갑니다. 한 낱말에 불과했던 명사들이 시인의 혼을 통하여 간택되고 시어로써 호명된 순간 가장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좇아서’ 3음절을 굳이 한 행으로 둔 이유와 ‘간신히’란 부사어의 무게를 가만가만 헤아려봅니다. 늦은 꿈을 좇아 괴발개발 끼적였던 저의 푸른 열정의 순간이 되살아납니다. 그 길은 즐거운 고통이자 행복한 우울이었지요. 꿈에 복무하듯이 살았습니다. 아직 꿈은 못 이뤘으나 시의 향내를 맡으면 결핍을 모르는 사람처럼 정신적 부르주아가 됩니다. 인생은 견딤을 요구한다 할까요. 보편성을 뛰어넘는 옛 노트 한 권을 넘기며 앵두가 익을 날을 기다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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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4 15:35:16
좋은 시와 시평 잘 읽었습니다.

이지희 2019-12-29 10:04:00
2019년 고생하셨습니다
오는 새해에도 좋은 해설 기대합니다 ㅎㅎ

김만태 2019-12-28 09:55:16
동지즈음
아주 며칠
기다란 햇살이 주방까지 스밉니다.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자르지 못한 미련의 꼬리가
자꾸만 밟힙니다.

앵두의 나목처럼
질끈 눈감고
그냥 또 살아보는거지요.

무철 2019-12-27 21:23:01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 장석남의 '옛 노트에서'를 올리셨네요.
이제는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인데 이 글을 올리셨네요.
올리신 글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내 과거의 노트를 펼쳐봅니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그리운 것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현재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냥 현재의 삶에 충실하도록 노력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김 기자님이 올려주신 '문학 톺아보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올 한해 수고하셨습니다.

이영훈 2019-12-27 19:42:45
좋은 시와 해설 잘 읽었습니다. 기자님 덕분에 시와 한발 더 가까워졌습니다. 한 해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