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의 유래와 정치인들④
"춘래불사춘"의 유래와 정치인들④
  • 이원선 기자
  • 승인 2019.12.13 15: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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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쇄신을 거론하지만 아무도 믿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학대하다 죽었다면 그녀는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무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병법이며 정치라고 했다.
왕소군의 초상    출처: 위키백과

 

2020년 4월 15일이면 제21대국회의원선거와 일부 지방자체단체장의 보궐선거와 맞물린 총선이다. 벌써부터 내가 최고다. 내가 적임자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우후죽순처럼 발을 뻗치고 있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시장의 각축장이 예상되며 늘 그랬듯 쇄신을 거론하지만 아무도 믿는 사람은 없다. 국민들의 신뢰가 추락하여 바닥을 치고도 남는다. ‘춘래불사춘’란 문장을 비유하는 정치인과 정치판이 한심스럽고 총선 이후의 정국 또한 변치 않으라는 것은 불을 보는 듯 명징하다.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죽은 후 돌아오려 했지만 풍습에 따라 왕소군은 호한야의 배다른 아들인 복주루약제(復株累若鞮)왕과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다. 이후 왕소군은 죽어 지금의 내몽골자치구의 호화호특(呼和浩特) 남쪽에 묻혔다. 어느 시인은 그녀의 죽음을 소군옥골호지토(昭君玉骨胡地土:소군의 아름다운 몸도 오랑캐 땅의 흙이 되었다)고 읊었다.

시조의 한 대목처럼 그녀의 삶은 그렇게 허무하지가 않았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최고의 왕비를 꼽으라면 대부분이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를 든다. 경종의 모후로 사약을 받은 장희빈(장옥정)을 지독히도 못된 여인으로 폄하하기 위해서는 다소 과장된 부분도 없잖아있지만 인현왕후가 보여준 자애로움과 후덕함 그리고 포용성은 현모양처를 대표하는데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거저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사가생활이 입과 몸이 괴로운 반면 마음이 편했다면 왕비의 생활은 입과 몸은 호강이지만 마음은 늘 칼날 위에 선 듯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늘 자신을 경계하여 심신을 갈고 닦았다. 이는 진주조개의 삶을 닮은 듯하다.

영롱한 빛깔을 자랑하는 진주는 조개의 속살에서 자란다. 사람으로 치자면 몸속에 돌을 넣어 기르는 형상이다. 그 지독한 아픔과 지난한 세월을 무던히 견딘 조개가 진주란 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왕소군이 오랑캐 땅으로 시집을 와서 베갯머리를 눈물로 적셔 자신을 학대하다 죽었다면 그녀는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무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장을 꿰뚫을 듯 싸늘하게 노려보는 시선들은 그녀를 쥐구멍으로 몰아갔을 것이고 음식은 물론 식수조차 입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짐승의 기름기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의복은 쳐다보기조차 싫었을 것이다. 또한 야만족의 습성에 따라 고기를 날로 뜯는 모습에서 환멸을 느꼈을 것이며 느끼하게 주위를 감싸는 짐승들의 누린 냄새로 인해 절망을 했을 것이다. 그 어렵고도 외톨이 같은 신세, 지금으로 말하자면 ‘왕따’의 신세였을지도 모른다. 왕따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호한야선우는 한나라로 떠나기 전 그간 공석으로 있었던 왕비의 자리를 후궁 중에서 간택한다고 선포를 한다. 왕비라는 자리는 가문의 영광이자 권력의 정점에 단박에 올라설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자 가장 쉬운 방법이다. 액수를 알 수 없는 금전이 뿌려지는 가운데 수명의 후궁이 암암리에 경쟁을 벌인다. 할 수 있는 방법이 총동원 되며 소원했던 명문가와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권력에 줄을 다는 등 무진 애를 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탈바꿈도 다반사, 상대방을 헐뜯고 폄하는 그저 애교에 지나지 않아 때로는 은밀한 살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총성 없는 전쟁터, 그 살벌하고도 암울한 기운이 칙칙하게 감싸 흐르는 왕실의 끝을 모르는 암투가 왕소군의 등장으로 한 순간에 끝나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낮도깨비처럼 나타난 왕소군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은 가운데 시녀들을 불러 모아 한족의 예의범절을 들먹였다. 닭 쫒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 격으로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후궁들로써는 탐탁지 않음을 떠나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앙앙불락, 공공의 적이기도 했다.

호한야선우가 제아무리 총애를 한다고 해도 입안의 혀처럼 늘 같이 있지는 못한다. 결계를 쳐서 방비를 하고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여도 빈틈은 있는 것이다. 이는 여태후가 유계와 척희의 아들인 여의를 혜제가 사냥을 떠난 틈을 타서 독살한 전례를 봐도 알 수 있다.

당초 호한야선우는 본인도 오랑캐지만 오랑캐 땅의 여인들에게 환멸을 느꼈던 모양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인들의 문란한 성생활, 다혈질적인 성격, 꾸밀 줄도 모르며 예의범절을 몰라 덜렁거리는 여인들보다는 정절을 중시하는 한족의 차분하면서도 순종적인 여자를 원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우연히 던진 낚시 바늘에 고래가 걸리 듯 모연수에 의해 돼지우리에 버려졌던 옥을 찾아 낸 것이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끝났기에 망정이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며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왕비란 직책은 그저 아름답게 꾸미고 우아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왕비가 되는 순간 정치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왕이나 세자가 없는 틈을 타 반란 등이 일어난다면 그 모든 책임은 왕비에게 있는 것이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왕비가 가지는 최고의 권위인 내지표신(內旨標信:조선 시대에, 왕비가 왕과 세자를 대신해 내린 표신. 국가의 긴급 사태에 관계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왕과 세자가 모두 서울을 떠나 신속히 대처할 수 없을 경우, 궁중에 남아 있던 왕비가 대신 명령을 하달하고 내린 것이다.)등등을 과감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진정 옥보다 더 아름다웠으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고 고운 여자였다. 나아가 지혜로웠으며 자신을 사랑하고 주위를 사랑했으며 내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여자였다.

손무의 손자병법에서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병법이며 정치라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을 청총(青冢)이라 우러러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