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라이프] '목칠공예'로 한 평생, 현문철 작가를 만나다
[마이라이프] '목칠공예'로 한 평생, 현문철 작가를 만나다
  • 장기성 기자
  • 승인 2019.12.10 17:56
  • 댓글 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가는 1960년대 후반엔 목공예와 금속공예에 심취하기 시작하여, 1970-80년대는 본격적 목공예에 빠져들었고. 1990년대에는 유지성형기법으로 목공예에, 2000년대에는 탁(卓), 상(床), 차상(茶床)에, 지금은 옻칠회화에 전념하고 있다. 마지막 꿈은 통일신라시대 유지성형을 계승하여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문철 작가의 50여 년간 작품활동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 '현문철 목칠조형 1967-2019'전이 열리고있다. 작가는 목칠공예에 전 생애를 바친 셈이다.
현문철 작가의 50여 년간 작품활동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 '현문철 목칠조형 1967-2019'전이 열리고있다. 작가는 목칠공예에 전 생애를 바친 셈이다. 장기성 기자

 

우리나라 원로작가이며 목칠공예가인 현문철 교수의 전시회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1967년 초기 작품부터 2019년 오늘날까지 약 50년간의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이 고스란히 총망라되었다. 한국 목칠공예의 산역사의 A부터 Z까지 전시되는 셈이다. 11월 마지막 토요일, 대구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그를 만났다. 반백(半白)의 작가였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은 10대를 능가할 정도로 기개가 넘쳤다.

 

-교수님은 우리나라 공예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작가라고 듣고 있습니다.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1948년에 대구에서 출생하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졸업했습니다. 1980년부터 2010년까지 대구가톨릭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도 함께 했습니다. 현재는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그 동안 수상경력과 심사경력도 많은 것 같은데요. 

▶전업 작가가 아니다 보니, 그렇게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못했습니다. 후학지도가 또한 급선무이다 보니까요. 대구시 교육감상, 대구산업디자인 초대작가상, 금복문화상, 대구공예대전 초대작가상, 한국공예가협회상, 홍조근정훈장 수여 등이 있습니다. 심사경력은 1981년 제13회 경북 산업디자인전 심사부터 시작해서 2018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전수교육 추천심사위원까지 대략 큰 것만 60여회 됩니다.

 

- ‘목공예’라고 하면 현문철 작가가 떠오르고, 현문철 작가 하면 목공예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유년시절에, 어떤 계기나 동기로 미술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우연한 한 계기가 저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저가 초등학교 5학년 미술시간이었습니다. 저가 그린 그림을 미술선생님이 보시고, 참 잘 그렸다고 하면서 교실 뒤편 칠판에 붙어주었습니다. 우리 반 학생이 40-50명 됐는데, 저의 그림 하나만 말이지요. 그땐 참 우쭐한 생각이 들었고, 그 한 번의 계기가 저의 인생을 바꾸게 될 줄 몰랐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새삼 느껴집니다. 이걸 계기로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학생들에겐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셈이지요. 30여년 교직 생활하는 동안 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자를 대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작품명(1984년 작): 흐름(流), Flowing / 티크, 장미목, 스테인
작품명(1984년 작): 흐름(流), Flowing / 티크, 장미목, 스테인.  장기성 기자

 

-미술전공이라고하면 서양미술이나 동양미술을 떠올리게 되는데, 굳이 ‘목공예(木工藝)’를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지금 시대는 순수미술, 응용미술,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들을 대중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술하면 서양미술만 떠올리기에는 힘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만. 제가 학생이었던 당시에는 학생들이 미술을 전공한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회화나 공예를 떠올랐고, 둘 가운데 하나를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저 역시 공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학과 교수님과의 인적관계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목칠공예가 김성수 선생님의 영향으로 목공예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 교수님이  저와 같은 동향(同鄕)이었거던요.

 

-이번에 ‘원로작가 회고전’ 전시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또 이제까지 몇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습니까.

▶이번 전시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주관하는 지역의 원로작가 전시의 일환으로 저가 선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초기 작품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변화와 흐름을, 작품뿐만 아니라 당시 팸플릿, 사진, 인터뷰 영상 등 기록물을 통해서 시민들에게 저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려는 의도 같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6차례 개인전을 했습니다. ‘제1회 목공예 작품전’을 1986년에 이목화랑에서 했습니다. 이땐 조각적인 작품을 많이 냈는데요, 작품 속에 이미지를 집어넣는 오브제(objet) 또는 스크립쳐(scripture)가 주제였습니다. 제2회 전시는 저가 일본 동경예대에서 연구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요, 말하자면 통일신라시대 전통기법인 유지성형(柳枝成形)을 바탕으로 해서 칠기작품을 대구백화점 갤러리에서 전시했습니다. ‘유지성형’이란 그릇을 만드는 기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3회 전시회는 2004년 ‘탁(卓), 상(床), 목칠조형전’이었는데요, 칠을 보다 승화시켜 기능성과 조형성을 겸비한 차탁(茶卓)에 중점을 뒀습니다. 말하자면 접대용 테이블을 주제로 해서 칠기제품을 선보였습니다. 네 번째 전시회는 2005년에 제자들과 함께한 사제동행(師弟同行) 개인전이었습니다. 가창에 있는 동재미술관에서 전시했는데, 큰 작품을 만들다보면 잘려져 나오는 자투리나무조각이 나오기 마련인데, 자투리가운데 조형성과 작품성이 있는 재료들을 골라 소품위주의 ‘차상(茶床) 칠기재품’을 전시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2006년 ‘소상 목칠 조형전’이란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찻상을 주제로 구성적인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도했습니다. 일종의 서양의 몬드리안(mondriaan) 미술작품으로 보면 됩니다. 여섯 번째는 2009년에 대구 EXCO에서 ‘차상 목칠조형전’이란 이름으로 전시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특히 소품이면서도 디자인과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는데, 소품에 옻을 입히고 거기다가 다시 색칠을 하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여 작품화 했습니다.그리고 단체전은 1966년 경미회전을 시작으로, 2019년 원로작가 초대전까지 36회의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작품의 전체적 경향성을 보면 유지성형(柳枝成形) 기법이 눈에 띕니다. 이 기법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동경예술대학교에 객원교수로 있을 때 칠기를 연구하는 미따무라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 교수의 책상위에 우리나라 ‘한국미술공예전집’이란 책이 놓여있었는데, 거기에서 ‘유지성형’이란 기법을 처음 봤습니다. 이 유지성형은 일본에 딱 한 점이 ‘정창원’에 보관되어있는데, 사실 이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신라왕의 사신(使臣)이 일본으로 가져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에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던 기법이라고 하면서 저에게 한번 연구해볼 것을 제안 받았고, 일본 체류 1년간 이 기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지성형 기법을 연구하게 된 계기입니다. 귀국 후에 경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유지성형 유물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총 133점이 보관되어있는데 그 중에 완성도가 뛰어난 게 33점이 있었습니다. 100여점은 모두 파손되어 물속에 특수 보관되고 있었고요.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수혜 받아 본격적으로 이 기법에 관한 논문도 쓰고 책자도 발간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시제품(試製品)을 만들었는데, 그러니 아직 상품으로는 개발하지는 못했습니다. 시제품을 문화상품화 하는 것을 저의 필생의 사명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품명(2003년 작): 우연+인공, Coincidence+Artificial / 과목, 미송, 생칠, 금, 은박
작품명(2003년 작): 우연+인공, Coincidence+Artificial / 과목, 미송, 생칠, 금, 은박.  장기성 기자

 

-요즈음 유행하는 단어가운데 ‘버킷리스트(bucket list)’ 있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말이지요. 혹시 가지고 계신다면 2-3가지 정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죽는 날까지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오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삶의 방법을 지속적으로 행하며 사는 것이 나의 삶의 철학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옻칠로 그린 그림을 칠화(漆畫)라고 하는데, 칠화 작업을 보다 깊이 연구하고 발전시켜 더욱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하나이고, 또 여력이 남는다면 유지성형을 상품화 하는 것이 둘째이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정리하여 한 번 더 개인전을 여는 것이 버킷리스트 3가지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30여 년 동안 대학에 재직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습니까?

▶여러 명의 제자가 생각나지만 1명만 꼽는다면 잘된 제자보다 그렇지 못한 제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유는 그 제자가 편입하여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교생활까지 제 옆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였는데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인테리어 사업을 해서 활발하게 활동도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아서 그 제자가 더욱 생각이 남습니다.

 

-향후 우리나라의 ‘목공예’가 나가야 할 방향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또 목공예의 세계적 추세는 어떻습니까? 특히 일본이나 서구의 발전경향 말이지요.

▶우리나라의 목공예는 초기 서양의 목공예에 따라 발전해 왔으나 점점 우리 전통기법 양식을 깨우쳐 우리의 전통 목공예의 발전과 현대화에 노력하는 경향성을 띄고 있습니다. 목공예는 세계적으로 조형성을 강조하는 작품으로 회화와 조각의 장르까지도 넘나드는 경향이 많은 추세입니다. 일본의 경우 전통 기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기법을 가미한 공예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의 목공예 역시 전통적 기법에 서구의 ‘오브제(objet)’, 조각 등이 망라된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목공예 이외에 취미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한번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25년 전부터 헬스를 취미로 주 2~3회 정도 열심히 해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의 본업인 작품활동을 위해 꾸준히 건강관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가끔 작업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조경, 화훼에도 관심을 가지고 취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명(1998년 작): 물방울 이미지, Image of Water Drop / 목, 칠, 색분
작품명(1998년 작): 물방울 이미지, Image of Water Drop / 목, 칠, 색분.  장기성 기자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목공예’를 전공으로 혹은 직업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하고 있는 목공예 작업에 너무나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목공예를 또 다시 선택할 것입니다. 목공예는 우리 생활 자체이니까요.

 

-작가로서 앞으로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요?

▶저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다 조형성이 뛰어난 칠기작품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신라시대 유지성형을 계승하여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품이 백화점에서 고급칠기제품으로서 생활용품화(生活用品化)되어 유지성형이 이 시대에 다시 부활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1-3전시장에는 많은 목공예 애호가들이 줄을 지어 관람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대열 속에서 이색적인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연로하신 이 분이 바로 현문철 작가를 미술의 세계로 이끌게 한 초등학교시절 미술교사 박휘락(84·대구교대 명예교수) 선생님이었다. 한 사람의 진로를 선택하는데 등대(燈臺)가 되어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제자의 전시회가 대견스러운 듯 연신 함박웃음을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