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02.27 17:0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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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제20시집 『먼지와 바람 사이』1972. 10. 20. 동화출판공사

 

이맘때면 꼭 생각나는 시다. 정기적으로 도지는 어떤 그리움처럼 일부러 찾아 읽는다. 한 행, 한 행이 모두 까막눈의 내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낱말만 골라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씀처럼 따뜻하다. 곡진한 사랑이 배여 있다. 어려운 시어나 표현은 찾아볼 수 없고 시 작법에서 흔히 다루는 ‘낯설게 하기’ 기법도 쓰이지 않았다. 그만큼 가슴으로 스며드는 속도가 빠르다. 유행을 타지 않고 봄마다 애송하는 이유가 아닐까한다.

이 시를 처음 만난 것이 중학교 국어시간이었다. 중년의 남선생님은 말수가 적고 수더분하여 시종일관 우수에 깃든 분위기를 자아내셨다. 시선을 줄곧 창밖의 운동장 어디쯤에다 던져놓은 채 허공을 보고 강의하는 무심한 스타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를 수업할 때면 그런 분위기가 교육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시인의 마음을 온전히 전해주려고 오신 신실한 전달자처럼 멋있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시를 좋아하는 계기가 됐을 게다.

어느덧 단발머리 소녀는 사라지고 두 번째 서른을 맞았다. 나는 분명한 나이건만 내가 아닌 것처럼 낯설다. 그러나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는 장면이 있다. 기억 한쪽에 각인된 영상이 초로기의 처진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거린다. 그 시절, 아지랑이처럼 자욱했던 웃음 속으로 안내한다. 순환하는 계절은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하지만 어린 가슴에 연둣빛 꿈을 꾸게 하던 시간과 선생님은 오실 줄을 모른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었어도 완전한 봄은 아니구나 싶다.

행간 사이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본다. 부지런해라, 꿈을 지녀라, 새로워라, 모두 명령문으로 두 번씩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감이 없는 것은 완곡어법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봄에는 반드시 부지런해야 될 것 같고, 꿈을 지녀야 될 것 같고, 새로워져야 될 것 같은 책임감이 생긴다. 어쩌면 이것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내포적 의미이며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부지런함의 크기, 꿈의 높이, 새로움의 넓이, 이런 것들은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 제한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껏 부지런히 꿈꾸고 새로워져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