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옥의 '훗날의 시집'
배영옥의 '훗날의 시집'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2.20 15:4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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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의 ‘훗날의 시집’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 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2019. 06. 11.

 

사람이 그리워지는 세밑이다. 서정시 한 편 읽으며 마음을 달랜다. 시를 읽는 일은 한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으리라. 척박한 조건에서 자란 나무의 단풍이 더 곱다고 하듯이 시도 그렇다. 어려운 상황에서 빚어낸 시일수록 더욱 눈부시다. 병적인 통증을 가슴 밑바닥에 욱여넣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아픔과 절망과 외로움의 입자들에게 문학이란 옷을 입혀서 독자와의 상견례 장소에 내보내는 자가 시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시집 한 권을 읽고 나면 그 사람의 한 생애 속으로 다녀온 느낌이 된다. 시란 대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나마나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답을 모르면서 죽자구나 시를 짓는 사람들, 죽자구나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훗날의 시집’ 이 시는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시집에 들어있는 첫 작품이다. 2행 혹은 1행이 한 연을 이룬다. 행간이 멀다는 것은 그만큼 영혼이 오래 서성거렸다는 증거가 아닐까. 배영옥 시인은 지난해에 세상을 떴다. 유고시집이니 현재가 그녀에게는 전생이다. 와병 중에도 詩業에 최선을 다한 사람 같다. 기존의 내 독서 방식대로 설렁설렁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이유다. ‘필사만 남겨지리라, 뒤집어보리라, 궁금해 하리라’ 예언이 유언처럼 읽힌다. ‘필사’, 시인 지망생이라면 필사가 팔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게다. 죽음 후의 시집이 어떻게 될지, 염려마시라. ‘피에 감염된 병자’의 피땀으로 찍어낸 시가 외면당할 리 없을 거라 안심시켜주고 싶다. 시인의 현생은 아무 고통 없이 편안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