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37)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 조신호 기자
  • 승인 2019.12.0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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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어야 소나무 잣나무의 돋보임을 안다.
사진 조신호기자
사진 조신호기자

 

지난 11월 28일 오전에 제주도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제주추사관’에 갔다. 이곳은 추사 김정희가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1840년(55세)부터 8년 3개월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되었던 곳이며,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법고창신하여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던 현장이다.

옛날에 대정읍 모슬포는 바람이 강해서 '사람이 살지 못 할 포구', 또는 '유배자들이 많이 와서 살 수 없는 포구' 라고 하여 '못살포' 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슬포는 추사 적거(謫居)지, 산방산, 가파도와 마라도 선착장 등으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지역이 되었다.

​주차장에 내리니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성벽이 우뚝 다가섰다. 이 성은 1417년(태종 17년) 제주 남서지역의 행정 중심이었던 대정현 현감(縣監) 유신(兪信)에 의해 처음 축조되었다. 초겨울 바람이 스치는 성벽을 우회전하니, 2010년 5월 건립된 ‘제주추사관’이 나그네를 반겼다. 이곳에는 추사기념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국문화재단,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해 준 '예산김정희종가유물일괄',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 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 글씨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뒤편에 추사가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 생활을 했던 나지막한 억새집 3채가 있다. 추사는 여기서 제주지방 유생들과 교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면서 제주목 왕래하며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유배 초기에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던 추사는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했다. 현재 추사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은, 1948년 4·3항쟁 때 불탄 후, 경작지로 이용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으로 다시 지은 제주 지역의 전형적인 억새 초가이다. 바깥채(사랑채) 부엌 뒤 작은 방에서 추사가 아이들을 가르쳤고, 모거리(별채) 왼쪽 작은 방에서 기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다. 이 방에서 초의선사와 만났고, 추사체를 완성하여 예산 화암사 ‘无量壽閣’ 현판을 썼고, 세한도를 그렸다.

흔히 추사 김정희는 알지만, 국보 180호 세한도는 잘 모른다고 한다. 겉만 보고 속을 들여다 보지 않는 수박 겉핥기 감상의 결과이다. 저 어설픈 그림이 어찌 국보인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한도는 그림과 함께 발문(跋文)을 찬찬히 읽어야 그 진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짙은 먹으로 거칠게 그린 그림은 늙은 소나무 두 그루와 집 한 채, 그 왼쪽에 잣나무 같은 두 그루가 앙상하게 구성되어 있다. ‘歲寒圖’ 라는 화제(畫題) 왼편에 작은 글씨로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 보시게)’과 阮堂이라 쓰고 ‘正喜’ 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 아래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랫동안 잊지 말자)’ 두인(頭印)을 찍었다.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廸·1804~1865)에 주는 연서(戀書)같은 ‘장무망상’ 울림에 가슴이 찡하다.

세한도의 발문(跋文)은 역관(譯官) 이상적에게 주는 편지였다. 우선이 그동안 연경(燕京·현재 베이징)에 다녀올 때마다 책을 구해 와서 유배 중인 추사에게 꾸준히 전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귀중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 79책을 보내왔다. 엄청난 고마움의 보답하기 위해서 세한도를 그렸다. 역경에 처해 있는 추사에게 변치 않는 의리와 절개를 변함없이 지켜준 제자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이다.

세한도 발문의 핵심은 논어 ‘자한’(子罕)편의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후조·겨울이 되어야 소나무 잣나무의 돋보임을 안다)라는 문장이다. 추사는 “성인(공자)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추운 겨울이 되어서 송백(松柏)이 푸르게 돋보이는 것은 곧은 지조와 굳센 절개뿐만 아니라, 차가운 겨울이라는 계절에 또한 느끼는 것(人情)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우선 이상적의 사람됨에 대하여 “세상은 세찬 물결처럼 오직 권세와 이익만 따르는데, 이토록 마음과 힘을 들여 얻은 것을 권세와 이득이 있는 곳에 돌리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고달픈 나에게 전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듯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이 말은 의리와 절개를 하찮게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사람답게 사는 인생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