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37)
녹슨 철모 (37)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12.0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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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반의 이성철이 사고를 쳤다. 보안대를 찾아가서 2대대 취사반의 비리 여러 건을 밀고한 것이다. 하긴 자기 딴엔 큰 비리라고 생각하여 신고하였지만 그런 일들은 모든 부대가 관례처럼 하는 것들이어서 보안대에서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민원이 들어왔으므로 일단 조사는 해두어야 한다. 성철의 고발 내용은 이런 것들이었다. ‘일요일 점심 라면에는 1인당 계란을 두 개씩 넣어 조리하게 되어 있는데 한 개밖에 넣지 않는다. 사병들이 공사를 하거나 훈련을 할 때는 증식미라고 해서 추가로 쌀이 더 나오는데 실제로는 밥할 때 증식미를 넣지 않는다.’ 즉 계란이나 쌀을 떼어먹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김장할 때는 고추와 마늘을 다 떼어먹고 김장한다' 등등이었다. 대대장은 “이번 사건은 군의관이 조사하라.”며 이성철을 태원에게 보내주었다.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왜 태원에게 지시하는 것일까? 대대장은 이번 사건이 터무니없는 밀고라고는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보급관들이 하는 행동은 좋게 보면 융통성 있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부정부패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같은 부대에서 동료 장교를 어떻게 조사할 수 있단 말인가?

대대장 자신은 부정행위와 아무 관계가 없고 부하들의 독직 사건이라고 생각해 중립적인 군의관에게 사건을 맡긴 것 같았다. 보통 장교식당은 사병용으로 나온 식자재들을 전용해서 부식으로 쓰는 부대가 많다. 하지만 태원의 대대장은 절대로 그런 짓을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상급부대에서 검열이 와도 접대할 담배가 없어 그때마다 태원에게 당번병을 보내 담배를 얻어 가는 사람이었다. 사병용 고춧가루는 희고 넓적해서 민간 식당의 붉고 촘촘한 고춧가루와는 쉽게 구별되는데, 한 번은 장교식당에 사병용 고춧가루를 썼다가 대대장이 식판을 통째로 던진 적도 있었다. 보안대도 모를 리가 없었다. 대대장의 성격과 지휘 방침이 청렴결백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민원이 들어왔으므로 대충 조사라는 시늉만 취하고 사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대에서 자체 조사 후 보고서를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다.

태원이 성철을 만나보니 정의감이나 우국충정을 갖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고 어떤 사소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걸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성철이 어느 날 취사용 무를 깎아 먹다가 보급관에게 들켰다는 것이다. 이 정도 행동이면 눈감아 줄 수 있고 훈계로 끝낼 일을 그는 ‘쪼인트’ 까고 욕을 해대었다는 것이다. 성철 생각에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으로 느껴졌다. 보급관 저는 대대장과 짜고 휘발유며 쌀 그리고 계란 등 부식을 통째로 떼어먹는 주제에 겨우 무 한 쪽으로 이럴 수가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태원은 성철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엉터리 일들이 세상 어디 군대에서만 있더냐. 언뜻 자신의 일부터 연상이 되었다. 말썽꾸러기, 데모꾼 등의 이유로 그는 자신의 대학병원 인턴시험에 응시도 못하고 군에 입대했다. 다른 종합병원에 취업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반드시 자신의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 갔다 와서 다시 응시하기로 하고 입대한 것이다. 대학병원은 공부 잘 해서 전공의가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 외에도 돈이 많거나 배경이 좋아도 된다. 태원은 거대한 조직인 정부와 대학의 권력에서 패배한 자라고 스스로 치부하면서도 언젠가는 뒤집어야 될 악이라 생각하고 일단은 체제 속에 얌전하게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자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야, 성철아 우리 구급차에도 매일 시동용 휘발유를 받게 되어 있는데 전혀 주지 않더라. 어떨 때는 후송을 가려고 해도 휘발유가 없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적도 있어.”

이성철은 소위 조사를 한다는 사람이 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나도 보급관과 대대장 찾아가서 여러 번 건의도 하고 싸움도 해봤지. 나도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다 떼어먹고 그러는 줄 알았거든...”

태원도 이런 말을 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하는지 몰랐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며 위안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모든 보급품이 우리 같은 말단 부대로 오는 도중에 이미 다 떼이고 내려오더라고, 네가 대한민국 군대 전체를 개선할 생각이면 모르지만 대대장이나 보급관 혼내주려고 고발하는 것은 별로 소용없는 짓이야.”

태원은 딱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구급차의 기름이 없었을 때 내 심정이 어떠했겠니? 내가 운전병에게 철조망 넘어가 기름을 훔쳐 오라고 명령을 했어. 하지만 그 녀석은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은 대대장 차의 기름을 빼서 후송을 간 적도 있어, 대대장은 자기 육사 동기생이 전차 부대장을 한다고 가끔 거기 가서 기름을 얻어 쓰기도 하더군. 자네 말대로 떼어먹는 나쁜 놈들도 많아.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나라 살림살이야. 지금 우리가 이북보다도 못 살지 않냐 말이야. 미군은 왕창 철수하고 우리가 맡은 지역은 늘어나고 게다가 미국은 우리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군사 원조를 확 줄였지? 나라는 가난하고 또 그 와중에 떼어먹는 놈들까지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지? 보안대? 그놈들도 다 마찬가지, 한패란 말이야. 말해도 소용없어.”

어떻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태원은 자신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건은 진실을 잘 모르는 한 사병의 오해였다고 종결을 짓고 말았다. 성철의 이유 있는 항의는 푸른 바다 속 한 알의 모래처럼 가라앉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부터 그는 숨어서 무를 깎아 먹기 시작하였다.

 

보리가 사람의 발등 높이만큼 자랐다. 이제 5월이 가까워진 것이다. 보리를 추수할 때쯤이면 군의관들의 이동이 있게 된다. 최전방 근무를 끝낸 군의관은 다음 해는 같은 군단 내에서 약간 후방으로 전근을 가게 되어 있다. 태원이 ‘알보병’들과 함께 뛰고 웃고 우는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매우 지루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태원에게는 보병들의 생활이나 철학이 그의 마음에 딱 맞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정반대의 두 감정들이 항상 그를 괴롭혔다. 질서와 무질서, 복종과 반항, 사랑과 증오 등 반대되는 양가감정. 그는 무지하고 삭막한 군사독재를 저주하고 항거도 하였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질서 있고 용맹한 사나이들의 집합체인 군대가 좋았다.

태원의 인생살이 또한 이러하였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의 성격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가 튀어나와 결과적으로 그는 사람들마다 다른 평가를 낳게 하였다. 그는 자유를 가장 소중히 여겨 군사독재를 저주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 또한 여자에게서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상대를 억압하고 소유하려고 하였다. 태원은 인간관계를 건성으로 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실제 행동은 또 달랐다. 그를 알고 지낸 사람 중에는 그의 이죽댐과 비아냥 뒤에 숨겨진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상대가 여자일 경우, 처음에는 매우 정열적이고 한편으로는 기괴한 느낌마저 주는 그의 일방적이고 과격한 애정표현에 딴 남자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묘한 이질적 매력에 빠져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는 그의 소유욕에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태원은 이런 현상이 자신의 표현 부족, 통화의 미숙이라고 이유를 대지만 그것은 자신도 그 원인을 잘 모르고 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대상은 자신이 가져야 되는, 즉 소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원은 사랑도, 그 대상도 피부에 닿게 소유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스스로 해석하고 있었다.

보리는 점점 자라가고 태원이 전방을 떠날 날도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날 비무장지대 안 G.P에 파견 나가 있는 공 병장이 귀대하였다. 그는 그동안의 경과보고와 부족한 약품을 타기 위한 온 것이었다. 태원은 그를 비무장지대에 보내 놓고 늘 마음 한구석이 찡하고 안쓰러웠다. 그곳은 철책선을 넘어 들어가 있으므로 변변한 방비도 없이 적의 G.P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태원도 말만 들었지 그곳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위 '북괴군'은 어떤 말을 쓰며 어떤 복장을 하고 있을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들은 모처럼 친정집에 나들이한 공 병장과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군의관님, 아직도 전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요.”

고참들은 임진강에서 인근 포병부대 강아지를 주워왔을 때를 떠올리며 신병들에게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야, 그 덕택에 이 라디오가 생기지 않았냐? 그게 다 용기 있는 우리 의무대의 군기가 아닐까?" 

이렇게 태원은 말도 되지 않는 이론을 피력했다.

"그래, G.P 생활은 할 만하더냐?"

태원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가장 힘든 건 물이에요. 세수할 물은 물론이지만 마실 물도 귀하다고요. 그렇지만 우리가 세수를 반드시 할 때가 있어요.”

일동이 그건 왜? 하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의기양양해져 말을 이어나갔다.

"한 달에 한 번씩 대북 방송요원이 오거든요. 육본에서 여자 군인이 온단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여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세수를 하지요. 하긴 세수라야 물이 없으니 '반합 따까리‘에 물을 받아 코에 찍어 바르는 정도죠.”

"그럼 그 여군이 니들을 예쁘게 봐 준데?"

태원이 확인이라도 하듯이 물어보았다.

"아니오, 우린 얼굴도 못 보죠. 걔 네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벙커로 들어가 버리니까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죠 뭐.”

정말 사내 녀석들이란 싱겁기 짝이 없다. 얼굴도 보지 못할 여자를 위해 왜 세수를 하는 것일까? 설사 얼굴을 본다 해도 또 잘나 보이면 무슨 득이 생긴단 말인가. 이런 남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바로 사랑을 얻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래 북쪽 놈들은 자주 보냐?"

태원이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야 보긴 매일 보죠. 아침에 안 보이면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요. 가끔은 걔네들을 만날 때도 있어요.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말뚝이나 기타 안내판의 페인트칠을 할 때죠. 이럴 때 양쪽의 병사들이 작업 도구를 갖고 만나는데 서로가 잘산다고 자랑을 합니다.”

"우린 뭐라고 자랑하고 걔네들은 뭘 자랑하데?"

"일단 걔네들은 우리가 미국의 괴뢰인 반면 자신들은 아무 간섭도 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민주공화국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수통을 건네줍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라고 태원이 반문했다.

“놈들이 수통에 설탕물을 넣어 와서 우리는 적어도 이 정도야 하면서 으스대는 거죠.”

"그럼 우리는?" 하고 다시 반문을 했다.

“야, 니네 라면이라고 알아? 먹어 봤어?” 하고 물으면 놈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죠. 그러면 “우리는 매일 설탕물 마시니까 그건 너희나 마셔. 우린 국수를 니네처럼 멸칫국에 넣어 먹지 않아. 우린 국수를 닭기름에 넣어 튀겨 먹어. 그게 바로 라면이란 말야.” 하고 놈들의 기를 죽여 놓는 거죠."

설탕물과 라면이 과연 서로의 체제 우위성을 자랑하는 지표가 되는지는 몰라도 전방 철책선 안에서는 이렇게들 젊은이들이 자신 소속의 우위성을 자랑한다고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