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36)
녹슨 철모 (36)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12.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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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가 면회를 왔다. 태원은 눈물이 났다. 밝고 잘 웃던 그녀가 굳은 얼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태원은 겉치레 인사말은 잘하지 않는 성미였고 또 묻고 싶은 말도 생략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시집살이가 힘든가 보지?’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특유의 습관도 있었지만 얼굴이 나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병주는 눈이 붉어져 있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겨우 입을 떼었다.

“여보, 나 임신했어요.”

마땅한 일이건만 태원은 놀랐다. 그는 결혼 뒤 바로 전방으로 돌아오느라고 예측도 못하였는데 벌써 임신이라고 했다.

"잘됐어. 그러면 자기는 엄마 되고 나는 아빠 되네.”

그는 반가운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병주는 시댁에서 왠지 장손의 애를 임신한 맏며느리의 대접이 하도 심드렁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마치 가출하는 기분으로 태원을 찾아온 것이었다. 태원이 소위 연애 시절에는 둘이 자주 만났고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였는데 막상 입대하고 결혼 후로는 연락을 딱 끊어 버렸으므로 그녀는 시댁도 시댁이지만 남편의 태도에 더욱 섭섭하고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태원이 어디에 몰두하면 딴 생각을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병주도 안다. 문제의 해결은 빨리 남편이 만기가 되어 후방으로 전근을 오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의관들의 이동은 해마다 보리 팰 무렵에 이루어진다. 5월 말이 바로 그런 시기가 된다. 그동안 태원은 자주 보리가 싹트는 밭고랑에 나갔다. 자주 와 보면 보리가 빨리 자라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재회를 기다렸으면서도 막상 부부가 만났는데도 옛날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서럽다는 생각, 잘못해주었다는 후회감에 태원의 가슴은 허전하였다. 병주는 그를 보자 더욱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들은 그 빈 가슴을 채우기나 하는 것처럼 격렬하고도 적극적인 육체의 결합을 치렀다. 초저녁인데 급하게 공병무 상병이 방을 두드렸다.

“군의관님, 비상입니다. 비상.”

짧게 말하고 녀석은 눈치껏 사라졌다. 그는 재빨리 군복을 입고 부리나케 부대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날은 재수가 좋아 진지 출동은 하지 않고 영내에서 대기하는 비상이어서 일찍 끝이 나 태원이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도 긴 이별처럼 느껴져 둘은 다시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뜨겁게 엉겨 붙었다. 

새벽이 되자,

"비상입니다. 비상입니다.”

이 상병이 문을 두드리고 갔다. 아무리 전방이라도 이런 일은 드물다. 하룻밤에 두 번이나 비상이 걸리다니... 이번엔 훈련 비상이 아니고 진짜 북괴의 게릴라가 나타났다고 한다. 전 부대가 출동했다. 보통 훈련 비상일 때는 정해진 전방의 진지로 투입되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법원리 쪽 후방으로 행군했다. 간첩들이 부대 뒷산을 통과해 서울 쪽으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법원리 쪽에 있는 후방 사단에서 간첩의 예상통로를 차단하고 있을 것이다. 태원의 부대는 북괴군들을 그 그물로 몰아가는 형국이었다. 

철책선을 뚫고 넘어 예비부대를 통과할 정도의 간첩이면 잘 훈련된 게릴라일 것이다. 평소들은 소문에 그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탓에 산악행군을 마치 우리 병사들이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한단다. 물론 사격 솜씨도 모두 특등이며 개인 격투기도 달인의 경지라고 했다. 포위의 그물을 좁혀 갔다. 피아 간에 아직 총격은 없었다. 아군의 작전이 훌륭하면 그들의 특기들도 다 헛것이 될 것이다.

출동하면서 전화도 없고 따로 앰뷸런스에서 내려 들어가 볼 수도 없어서 태원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병주에게 말도 못하고 부대를 떠났다. 

일전불사를 예상하며 계속되는 행군에는 낙오자가 없었다. 구급차는 부대의 뒤를 따르지 않고 냅다 보란 듯이 첨병 쪽으로 내달려 선두를 향했다. 어느 지점쯤 가자 무전이 왔다. 대대 지휘소를 마련하겠다며 의무대는 행군을 중단하고 대대장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대대 지휘소의 천막이 쳐지고 인근에 통신대와 의무대가 자리를 잡았다. 

대대의 예비중대는 지휘소 경계를 위해 부근에 남고 나머지 세 개 중대는 작전지구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적들은 포위망 속에 들었는지 교전은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의무대는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최소한 적은 멀리 갔거나 잠복해 버려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밤이 되자 전초 배치되었던 중대가 돌아왔다. 무척 지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행군만 있었지 적은 만나지 못하고 귀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가장 멀리 간 6중대는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해 돌아오다 소대장과 중대장들이 호주머니를 털어 두부를 사서 사병들과 같이 먹었다고 한다. 이 일로 밥을 굶어 화가 날 법도 하건만 오랜만에 장사병들은 서로가 한 식구임을 실감했다며 흐뭇한 표정으로 귀대하였다. 

게릴라는 후방부대에서 잡기로 한 모양이었다. 부대가 전부 귀대한다고 했다. 구급차가 부대에 들어가기도 전에 태원은 뛰어내려 그의 숙소로 달려갔다. 병주는 없고 어둠만 빈방에 가득 차 있었다. 쪽지도 없었다. 전에 가끔 하숙방에 왔다가 그냥 갈 때는 쪽지도 있었는데 사정을 모르는 병주가 섭섭하고 화가 나서 그냥 간 것 같아 태원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병주를 보내고 나서 태원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였다. 까탈스런 부모는 그녀의 임신 시기를 두고 탐탁지 않은 눈치인 것 같고 병주는 성격상 순하기만 한 탓에 무엇이 틀려도 묻거나 항의하지 못했다. 처녀 때는 그런 그녀의 성격이 태원의 마음에 딱 맞았으나 이제 결혼한 사람이 되어 현실에 부딪쳐보니 그런 성격으로 인해 손해만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태원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에 짜증이 나 있었고 또 자신의 그런 습성에 이미 길들여진 병주의 태도 또한 불만이었다. 하지만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다. 더욱 안타까울 뿐이었다.

 

황혼이 짙어지는 어느 늦겨울 저녁 지프를 타고 태원은 대대 부관참모와 함께 전방으로 가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면서 그의 우울은 어느 정도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 후유증이 남아 있어 주변의 조그마한 자극이나 스트레스에도 쉽게 좌절하고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붉은 황혼의 하늘은 그의 마음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주었다. 

그가 가고 있는 전방은 대대 장벽고가 있는 곳이었다. 장벽고란 전쟁이 나면 빠르게 적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응급용 무기를 비축해둔 곳이다. 후방에서 완전한 물자 수송이 이뤄질 때까지 방어용이나 혹은 후퇴 시 써먹는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곳에는 분대 병력이 파견 나가 상주했다. 그들이 단독으로 부대를 떠나 있는 만큼 이들의 근무 보고만 받는 것이 아니고 수시로 장교들이 순회점검을 하기도 했다. 

태원은 원래 소속이 연대일 뿐만 아니라 보병이 아니므로 이런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대대장은 아무리 군의관이라도 기왕 대대에 파견 나와 있으면 동료 장교들의 업무도 참관하고 진정한 군인의 참모습을 보아야 한다며 이번 순회에 그를 집어넣은 것이다. 태원 역시 그런 일을 좋아하였고 그의 외모가 2대대에선 가장 보병다운 모습이었으니 이런 곳에 가도 보병들은 깍듯이 그에게 예를 갖추곤 했기에 더욱 그런 일을 좋아하였다.

날은 춥고,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데 오가는 이 없는 무인지경의 전방 황톳길을 달리는 태원의 가슴은 병주의 일과 자신의 우울증, 그리고 이 경치가 뿜어내는 슬픈 분위기에 이중삼중으로 심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장벽고 부근에 소리를 죽여 차를 세우고 철조망으로 다가갔다. 정문에는 아직 초저녁인데 보초라는 녀석이 총을 옆에 세워두고 벌써 앉아 자고 있었다. 부관이 살금살금 다가가 가만히 놈의 총을 빼앗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손들어!”

부관이 뺏은 총으로 자는 놈의 가슴을 쿡 찌르니 보초병은 제 총을 찾아 덤벼들 생각은 않고 쉽게 손을 들고 벌벌 떨고 일어섰다. 이놈의 생각에는 또 게릴라들이 왔는가보다 여겨진 모양이다. 그 뺏은 총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 장벽고 파견 대장으로 나가 있는 오 상사에게 전말서를 쓰게 하니 이 사람은 벌벌 떨면서 어딘가로 갔다. 잠시 후 그는 따뜻하게 끓인 라면과 소주를 한 병 들고 와서 무조건 살려 달라며 빌었다. 늙은 상사가 아들뻘 되는 두 장교에게 꿇어앉아 비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라면의 맛은 기막히게 좋았다. 아마 뇌물의 맛은 언제나 이렇게 달콤한 모양이다. 

사실 이 사건을 그대로 대대장에게 보고했다가는 해당 중대장만이 아니고 전 부대 장병이 고통을 받을 것이 눈에 선했다. 보통 문제가 터지면 장교, 하사관들은 영내 대기를 시키는 게 관례다. 중소대장들은 평소에도 그들의 숙소가 영내에도 있어 큰 어려움이 없지만 참모들이나 하사관들은 잘 곳도 만만치 않고 여러 가지가 고달프게 된다. 장교들이 이런 기합을 받게 되면 사병들도 잇달아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뻔하였다. 그래서 태원과 부관은 그때 그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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